대책이 없을 때는 대책이 없어서.....
- 동화 밖의 세라들
<Black Cat> 기드온 루빈
천진난만, 웃는 얼굴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얼굴을 지키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꼭 잡아 타야만 하는 버스를 향해 달릴 때는 두 다리에만 온 신경이 닿아 있듯이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쁠 때는 정말로 거울 한번 들여다볼 시간이 없죠.
이 모든 것이 살아남기가 팍팍해서 그렇습니다.
살아남을 대책이 안 보일 때가 많아서,
자칫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허방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아서,
초조함과 불안감에 우리 몸과 정신에서는 초록빛 수분이 시나브로 날아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밀린 고지서, 꽉 닫힌 창문, 창백한 형광등, 끈적한 장판, 아무리 내뱉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한숨....
지나와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
따져보니 실은 얼마 안 된 시간의 일이네요.
글 쓰는 사람의 길이라는 게 대책없는 시간들과 대책이 생긴 시간들의 이어짐이었으니까요.
이상한 것은 지나고 나니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 깊고 미끄러운 우물을 어떻게 기어 올라왔는지를...
어쩌면 모든 걸 망각이란 쓰레기통에 쑤셔넣어 버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을 겁니다. 그리고 저처럼 다 잊어버렸을 겁니다.
문득 궁금했습니다.
왜 그 시간을 어찌 보냈는지 까맣게 잊은 걸까?
어쩌면 우리가 평범해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조언이란 성공한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고생담이란 그 터널을 지나 '짠!'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해줘야 들을 만하다 믿죠.
사실 언제 다시 대책없는 시간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평범 속에서 뭐라고 해줄 말이 있겠나 싶은 것이죠.
용기를 낼 수 있는 조언이란 모름지기
지금 답답한 이 터널의 시간이 거름 같은 시간이라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소공녀> 삽화
돌이켜보면, 미래의 꿈으로 지탱하기 힘든 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책이 없을 때는 정말 대책이 없어서,
필요한 것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당장의 대책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밀린 고지서를 해결할 현금,
다음 달 고지서를 밀리지 않게 해줄 일자리,
내가 하는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단 한 명의 응원,
형광등이 아닌 햇빛 아래로 데리고 나가줄 따뜻한 손길.......
필요한 것치고 많지 않다고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소공녀> 삽화 하지만 힘들고 외로운 날에는 이 중 단 하나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절박하게 필요한 손길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괜히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아서, 두렵고 두려워서,
마치 갯구멍에 숨은 게처럼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시간에 박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쁠 것 없고, 뽐낼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음이란... 존재란...
모두 다 벌레처럼 자비없는 세상에서 떨고 있는 존재지요.
구스타프 도레, <런던>
성공한 사람들의 용기있는 에피소드와는 달리, 평범한 사람들은 숨쉬기도 힘들 뿐인 시간이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 시간을 흘려 보냅니다.
대책이 없는 채, 어떻게 그렇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한번 가만히 복기를 해보았습니다.
<소공녀> 삽화 요즘 아이들은 잘 안 읽는 것 같지만, <소공녀> 혹은 <소공녀 세라>라는 동화가 있었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사업가 홀아버지 밑에서 고명딸로 자라난 세라가 뜻하지 않는 불행으로 어렵게 살지만 착한 마음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살다가 마지막에 기적같이 행복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1985년 만화판
동화가 동화인 이유는
주인공이 기적처럼 해피엔딩을 맞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낙관적이라 믿음 만으로도 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어린이가 자라듯
동화에서 소설로 옮겨가야만 합니다.
허구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
어떤 소설들이 답답하기만 한 건 현실을 잘 담았기 때믄이죠.
세라는 우리 현실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기적이 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요?
알고보니 아버지의 사업이 성공했고, 알고보니 그 아버지의 친구가 자신을 애타게 찾는 일은 로또 당첨보다 일어나기 힘든 일이죠.
기적이 일어나기 전, 세라는 대책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습니다.
우리의 젊은 날과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세라가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기품있는 여성으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라가 한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또 하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환기를 잘 했다는 것.
<플란더스의 개> 표지 첫 번째,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개인적으로 대책없는 시간을 지나갈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과 죽음은 같습니다.
문제해결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서요...
물론 생각한디고 다 실현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생각이 최악으로 치닫게 되므로 자신을 더 괴롭히게 됩니다.
세라는 자신에게 한 가지는 남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도 자신만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책은 없을지라도, 자기를 지키고 있으면 생명은 본능대로 삶을 향해 대책을 찾아갑니다.
그걸 찾다가 방전이 되더라도 잠시일 뿐, 쉬었다 다시 살 궁리를 하죠.
하지만 죽음이라는 쉬워보이는 생각에 맥없이 혹하게 되면 대책이 생겨도 외면하게 됩니다.
<플란더스의 개>의 네로처럼,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지요.
사회에 상처받고,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다고 느껴지면 잠시 주저앉아 멈출지언정
끝을 구원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 그 속에서 네로와 세라를 끌어내주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대책없는 사람들을 끌어내주는 손을, 저는 그렇게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불쌍한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죠...
<소공녀> 표지 두 번째, 환기.
방안에 홀로 있더라도, 바깥 공기가 드나들 틈은 열어놓아야 합니다.
대책은 자기 범위 내에서만 없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책이 없던 시절,
아주 조금이라도 힘이 나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
옛 사람들도 그랬어요.
고흐, 추사, 다산, 사마천......
아주 많은 명작 편지들이 대책없이 외롭던 시절에 쓴 것들입니다.
유명인사들의 편지라면 되게 멋져 보이지만,
제 경험으로 겉멋 다 지워보면 내 범위에서 찾을 수 없는 대책을 혹시나 찾을까 싶어 타인을 향해 한 뼘씩 범위를 넓혀갔던 것 같습니다.
치사하다는 생각, 창피하다는 생각, 비루하다는 생각....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홀로 독야청청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던 자존심이
꿈이라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모두를 향해 꺾일 수 있는 자존심으로 바뀌는 과정이
어쩌면 어른이 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알 것도 같습니다.
<소공녀> 삽화
그렇게 하여,
이 세상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대책없이 살아가느라 온갖 고생을 다한 결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 것도 같고요.
작은 일에 얼굴이 벌개지며 애써서 상황을 돌파해내려는 모습도
그 뒷사정까지 볼 수 있는 눈도 가지려 노력도 합니다.
그러니 대책이 없을 땐, 숨만 쉬더라도 딱 두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환기를 하면서, 지금 이 시간도 결국은 살기 위해 지나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절망의 풍경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 '절망적'이라고 말할 때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주면 좋겠습니다.
가끔 팍팍하다 못해 화가 잔뜩 쌓여서 내 절망은 진짜이고 네 절망은 가짜라고 비난하지 말고요...
객관적인 절망이란 것도 없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해봤자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너무 가난하고 절망적이라고 말해도,
기아에 시달리는 극빈국 아이에게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행의 배틀이란 그렇게 쓸모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를 저주하고 비난하기 보다,
숨을 고르면서 문득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서
작은 도움을 받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책이 지금의 진창을 건너는 결정적인 징검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세상은 서로 빚을 지며 사는 것이니,
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대책없는 누군가에게 작은 디딤돌을 놓아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면서,
그렇게 서로 대책없는 시간을 건너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