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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Oct 05. 2020

현대, 전통적인 문사철文史哲로 충분할까?

- 전문지식은 왜 부족할까?(1)

바야흐로, 인문 과학의 시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아직 중국이 중공이고 러시아가 소련이던 냉전 시대, 그 얼음의 칼날에 반으로 나뉜 한반도의 상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리영희 교수님의 저작 제목입니다. 맞는 말이죠. 한쪽 날개만 가진 새는 날기는커녕 공중에 뜰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작가가 된 후, 서점에 갈 때마다 이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제가 생각한 건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찾을 수 없는 책들은 늘 전문분야, 특히 과학분야였습니다. 저는 좌측의 인문학만큼  과학을 비롯한 각종 특수 분야도 좌측만큼 크고 단단한 우측 날개를 기대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인문학 분야에서도 저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책들이 많지 않았죠.

 21세기에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아직 친절한 책들이 많지 않아서 대중들에게는 좌측이든 우측이든 지식정보라는 면에서 빈혈에 시달리는 새들밖에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책을 안내해주는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후에도 우리 사회의 지식정보는 인문학 쪽이 비대하게 큰 날개로 현대라는 이 세계의 하늘 위에 떠 있었죠. 제 눈에는 떨어질 듯 기울어진 채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판화가 이철수 <새는 온몸으로 난다>

 인문과학. 언젠가부터 우리사회는 인문학을 인문과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혹자는 과학이 득세를 하면서 모든 학문에 ‘과학’을 붙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말로 된 지식의 강으로 흘러드는 과학은 너무 빈약합니다. 진짜 전문가나 과학자들이 제공한 지식의 물줄기는 말라버릴 듯 희미하죠.


왜 그럴까요?

우선 문학을 하는 저로서 과학에 한해 자아비판을 하자면, 문사철文史哲 전통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무릇 지성인이 갖춰야 할 인문학이 문학, 역사, 철학이었고, 이 교양을 통해 세상을 밝게 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틀린 말일 리 없습니다. 문학은 현실 보다 더 현실적으로 세상을 느끼게 하고, 역사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을 한 차원 높은 위상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철학은 이 모든 것의 의미에 대해 항상 깨어있게 만들어 인간이 인간이게 만듭니다. 그러니 문사철 없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킬 수 있을 리 없죠.  하지만 19세기 이후에도 이것만으로 충분했을까요? 이것들 만으로 세상이 제대로 보였을까요?



아니, 20세기 이전에도 뭔가 부족하지는 않았을까요?

이 의문에 대해 답하려면 뉴턴의 <프린키피아>나 베이컨의 <신기관> 같은 책을 예시로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대한 고전이라는 것은 압니다. 즉, 문사철 외에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에 대한 책이라는 것이지요.

뉴턴 <프린키피아>

이 책들이 나온 시대는 유럽의 17~18세기지만, 고대부터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기하학이 있었고,  플라톤의 아테네 학당에 ‘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라는 말이 써있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의 교양이란 문사철 외에 물리적 자연에 관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

물론 동양이나 우리나라에도 <의산문답>에서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 쓴 홍대용 같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주류 학문으로서 세상을 보는 교양이라는 분류 안에 속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문을 중시하고 기술을 천시하는 전통도 과학을 교양의 일부에 포함하지 않는 태세에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근대까지 이어져 출판계에서 과학 출판물은 비주류였습니다. 이는 출판 종사자들 대부분이 전통적인 문사철을 전공했고, 저자 대부분도 인문학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유도 있죠. 그리고 격동적인 근대사도 과학 출판물 보다는 당장의 이념충돌과 복잡한 사회상을 설명하고 분석해줄 인문학과 사회학에 치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과학은 훨씬 더 전문적이 되었죠. 같은 과학자라 하더라도 세부 분야로 들어가면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전문적이고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 문사철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과학은 접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지식과 정보를 나누기 위한 노력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전문지식 중에 이해하기 어렵기로는 손에 꼽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대중도서도 만들어졌지요. 외국에서는요.

   

그런가하면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칼 세이건과 같은 과학자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어려운 분야의 지식을 전문가에게 맡겨놓지 않고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노력을 살펴보자면, 영국에서는 적어도 200년 전부터 그 역사를 따질 수 있습니다.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 해에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강의하는 '크리스마스 과학강연'이 200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우리는 과학을 과학자에게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과학을 위시한 전문지식에 대한 정보는 더 많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행히 출판계에서도 이에 대한 노력을 다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책이 번역서죠. 그나마 잘 팔리지도 않고, 이 지식정보를 모으려는 노력도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출판계의 문사철 전통이 깊은 데에만 그 책임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지식정보를 요구하지 않는 대중에게도 지식정보의 합으로부터 미래의 무한 잠재력이 발산된다는 것에 대한 혜안이 없는 국가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가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캐낸  지식 정보를 대중속으로 퍼뜨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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