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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위 Nov 24. 2022

그래도 영화가 좋아,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수능 다음날 (재량휴업일이었기 때문에) 지인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다. 

평일 오전에 영화를 보는 것은 학기 중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몹시 설레었고, 

그 설렘의 크기만큼 두통이 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컸다. 

영화를 보러 나가기 전 아이들을 보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탁기를 돌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씻어야지 생각하는데, 편두통이 왔다. 아! 또 올 것이 왔구나. 그래도 수능이 끝나고 왔으니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가방 속에 있는 약을 찾았다. 약이 있으니까, 약을 먹으면 영화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 앞이 보이지 않는 전조 증상은 이내 사라졌고, 두통의 강도도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영화 보는 일정을 강행하기로 했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 영화를 보았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고 그리고 꼭! 극장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다. 

영화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맥시멀 했고, 정신 없었으며, B급 정서와 감독의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리고 매우 너무 대단히 아주 좋았다.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울었는데, 에블린의 상황에 너무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롯이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 


나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1년 하다가 다시 영화과에 들어갔다. 

친구들이 현실에 뿌리를 내릴 때 나는 영화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친구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때 나는 는 가난한 영화과 학생이었다가, 재능이 별로 없는 영화과 학생이었다가,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영화과 학생이 되었다. 졸업을 하기 전에 결혼을 먼저 하게 되었고, 회사원인 남편은 휴가를 내어 내 졸업 영화의 붐맨이 되어 주었다. 졸업 영화를 찍고 나는 계속 영화를 꿈꾸었다.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를 보았고, 자주 동네를 걸으며 시나리오가 될 삶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집 첫째, 나무가 왔다. 

나무를 임신했을 때 스릴러 시나리오를 썼던 건 안비밀이다. (나무야 미안)

나무를 낳고 갓난아기를 옆에 눕혀 놓고 나는 가난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썼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나무의 엄마가 되고 나는 천식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천식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내가 영화하는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식에 편두통. 편두통과 천식.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으로만 남게 될까봐 두려웠는데,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그날,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햇살이 눈부셨다. 햇살이 눈부셔서, 너무 눈부셔서, 조금 속상했던 것도 같다. 


무수한 평행우주에서 에블린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당연히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배우 에블린이었는데, 물론 배우 양자경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일 거다. 나도 나의 무수한 평행우주에 대해서 생각했다. 영화감독이 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다른 나이듯이 다른 평행우주에서의 나는 무수한 '나'들 중 하나이고 동시에 지금, 여기의 나는 아닐 것이다. 나는 에블린이 세탁소를 하는 에블린이어서 좋기도 했다. 무수한 평행우주 중 세탁소를 하는 에블린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가장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서. 가장 포기한 것이 많아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영화가 너무 좋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의 세계들이 너무 좋다. 그것은 또다른 무수한 평행우주들일 수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나무는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아직 초등학생인 나무가 좋아하는 영화는 다르지만, 나무도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만든 졸업 영화는 몇 군데 영화제에서 상영을 했는데, 그때 GV를 할 때 나무가 뱃속에 있었다. 

나무가 조금 더 크면 이 영화를 꼭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이 평행우주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또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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