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잘 지내냐고, 커피 한잔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연락해본다고.. 어느새 만개한 벚꽃만큼이나 너무 반가웠다.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44살의 나이에 인연이 된 친구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만났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종의 리추얼(ritual) 같은
혼자만의 여행은 2018년 처음 시작되었다.
김영하 산문 '여행의 이유' 중 격하게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특히나 다양한 역할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나에게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그것이 혼자 떠나는 여행의 이유라면 이유이다. 해마다 한 해가 시작하면서 새로운 여행지를 물색하는데, 올해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 시국을 맞이하게 되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직도 여자 혼자(그것도 중년의 여자) 여행을 다니는 것에 편하지 않은 시선들을 느낄 때가 많아서 뻔뻔하리만큼 낯짝이 두꺼워져야 한다. 무슨 사연 많은 여자로 찍히기 딱이다. 이런 불편한 시선을 견뎌내야 하지만 그래도 혼자 떠날 여행을 계획하면서 에너지가 차오른다
처음 떠났었던 여행지는 강원도 정선이었고(호텔 패키지 상품이었는데 요가&명상 프로그램 참가에 숙박과 조식이 포함되어 있어 힐링 그 자체의 여행이었다. 처음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이었던지라 소심하게 호텔 안에서만 머물렀다) 두 번째가 일본이었다. 고민의 나날을 보내다가 여행사 패키지 상품에 덜컥 계약금을 송금했다. 일본은 처음 방문이라 혼자 떠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맘 편하게 다녀오자 싶어 내키지는 않았지만 패키지를 선택했다.(여행사 패키지 상품은 주로 가족, 친구들의 동반 여행이 많았다. 시기도 구정 연휴기간이라 혼자 덩그러니 그 무리에 있는 나는 관심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연으로 내가 혼자 여행을 온 것인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궁금증의 시선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함께 여행을 시작하게 된 그러니까 시은이는 친한 언니와 둘이서 여행을 왔다.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면서 세명이 원래 함께 떠나 온 것처럼 친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동갑의 나이에 통하는 게 너무 많은 시은이는 낯선 곳에서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끔씩 연락해도 편한 사이로 기약 없는 다음 여행을 함께하자고 약속한 인연이 되었다.
김영하 산문 ' 여행의 이유'에서 작가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팍팍한 삶에서 나에게 여행이란? 그저 포상 휴가 같은 것이었다.(슬프게도 어린 시절 여행의 기억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회사 창립기념일 15년 근속상으로 중국 여행을 선물 받았고, 출장이라는 명분으로 일 따라 지방을 돌아다녔었다. 한창 캠핑을 다니던 시절(그때는 젊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소형차 안에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짐을 정열 하고, 뙤약볕 아래 텐트를 치고, 다시 텐트를 철수하고, 집 베란다로 옮기는 무슨 극기 훈련 같은 여행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삼겹살을 마주하는 찰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릴 때 가족 여행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고, 그냥 집이 최고다를 외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런 내가 혼자만의 여행을 기획하고 겁도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건 여행의 이유가 분명하고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처음이 힘들지 한번 경험을 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새로운 자극이 되기 시작했다. 더 나이 들기 전 부지런히 다녀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마카오에서 홍콩을 갈 때 배로 이동하면서 심하게 뱃멀미를 한 적이 있다. 더 나이 들기 전, 체력이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되기 전 부지런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살면서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는 건 내 삶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여행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일상에서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렇게 혼자만의 여행은 오직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을 길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