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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Mar 02. 2022

지나쳐 버린 3.1절과 평화의 의미


 어제는 3.1절이었다. 예전 같으면 3.1절을 기념하여 방송에서도, 신문 매체에서도 3.1절을 기념하며 여러 가지 행사를 했을 텐데, 예년과 비교해 좀 조용히 넘어간 모양새다. 현대인들에게 3.1절은 이제 징검다리 휴일 정도로 여겨진 것인지, 아니면 현재 알고 풀어야 할 너무나 많은 이슈가 산적해 있어 이 국경일에 신경을 못 쓰는 탓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야 할 사명감이 충만했던 그 시기에 비하면 개인적인 고민거리가 많은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노후를 준비할지, 아이들의 3월 수업은 어떻게 진행될지, 각각의 개인적인 고민이 저마다의 삶 속에 묻어 있다.


 개인과 국가의 고민은 같을 수가 없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갈지 고민이다.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다 고민거리다. 신학기를 맞이한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감지한 어른들은 점점 바뀌는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가족들을 보살피며 잘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국가는 점점 변해가는 국가 정세 속에서 입지를 다지며 생존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기후 위기, 에너지 싸움, 나라 간의 견제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나 근 3년은 지구촌 전체가 코로나로 몸살을 앓았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이 코로나 위기를 잘 극복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과 국가의 고민을 모두 얼어붙게 만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일어난 지 거의 일주일째다. 모든 매체에서는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을 제1면으로 다루며 시시각각 변해가는 비극적인 상황을 연신 전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지구 상의 많은 전쟁을 역사서, 영화에서 봤지만, 지금 이 전쟁처럼 공포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얼마 전에도 뉴스에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절박했던 탈주를 보도했다. 그 이전에는 미얀마 폭력 사태, 그리고 수많은 전쟁이 우리 지구촌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런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제쳐 두고 이 전쟁이 더 가슴 떨리고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모든 평화의 상징이었던 베이징 동계 올림픽 끝자락에 펼쳐진 전쟁이었기에 더 그럴 것이다. 수많은 비극적인 상황과 상황이 연이어 진행될 때 벌어지는 전쟁은 체념을 가져온다. ‘그럴 줄 알았어.’라는 체념과 함께 그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로운 평화 시간 뒤에 펼쳐지는 비극은 경악과 함께 충격을 함께 안겨준다. 이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나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기간, 많은 지구촌 사람이 중국 선수들의 반칙에 분노하고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에 흥분하던 시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동계 올림픽 각국 선수들이 보여주는 경기력에 놀랐고 공정한 스포츠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공정하지 못한 심판에 분노했다. 스포츠가 가진 정정당당함을 좀 더 부각하고, 다음 경기에는 좀 더 공명정대한 경기가 되길 기원하며 서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갈 그런 시기였다. 우리의 삶은 개인적인 갈등, 사회에서 누적된 갈등을 제외하곤 평화로웠고 소란스러웠다. 다시 개인의 삶으로 돌아가 떨어져 가는 주식, 나날이 올라가는 물가 등을 걱정하며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런 평화로운 우크라이나 세계에 폭탄을 던졌다. 개인들이 가진 사소한 고민은 국가들이 벌리는 거대한 싸움 앞에서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러시아가 폭격한 우크라이나의 민간 아파트의 상황들, 학교, 거리, 그리고 사람들. 러시아가 저지른 모든 일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생생하게 배달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우크라이나 비극적인 사연들은 첩첩이 쌓이고 사람들의 충격과 분노들도 점점 누적되는 실정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른들의 반공교육과 전쟁의 공포로 한시도 편하지 못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도 전쟁이 멀리 있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의 명령 하나로, 국가들의 이권 다툼 하나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 바로 평화였다. 그 속에서 언제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솔직히 러시아가 왜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이 전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평화로운 시대에 불시에 일어난 이 전쟁은 진행 중에도, 끝난 후에도 지구 상의 많은 사람에게 많은 후유증을 안겨 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차가운 잔혹성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감싸는 따뜻한 인류애도 충분히 맛보고 느끼고 있다. 항상 인간은 지금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잃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는다.


 살 터전을 잃고 살기 위해 폴란드 국경을 향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보며 일제 강점기에 외로이 ‘조국 독립’을 외쳤던 선조들을 떠올린다. 누구 하나 도와줄 나라 없이, 아무런 희망 없이 외쳤을 그 외침들은 얼마나 처절했을까? 폭격 소리와 총칼 위험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와 시대에 태어난 것을 안도하다 나의 이기심에 다시 부끄러워진다. 국가의 평화 위에서 비로소 개인의 고민이 싹 틔울 수 있을 텐데 자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무엇보다 먼저 기념해야 할 3.1절을 개인적인 고민으로, 신학기 스트레스로 흐지부지 넘겨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척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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