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면 마음이 괜스레 바빠진다. 동면하는 곰처럼 1월과 2월까지 느지막이 여유 부렸다가 3월부터 갑작스레 쏟아지는 스케줄들로 호되게 채찍질을 맞고 있다. 매년 이런 일들을 예상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면 좋으련만 매번 겪는 일인데도 잘 적응이 안 된다. 일 주변머리가 없는 탓에 기존에 해 왔던 하루의 일 할당량과 새로운 일정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어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가늠이 잘 안 된다. 그래도 내 일만 처리한다면 조금 시간이 걸려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텐데, 3월은 아이들의 신학기가 시작되는 시기라 더 정신이 없다. 매해 학년 초에는 학교들마다 작성하고 사인해야 하는 서류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정신없이 내야 하는 서류들을 작성하다 보면 이 서류가 큰 애 학교 서류인지, 둘째 학교 서류인지 가끔 헷갈린다. 겨울방학의 평화로운 한가로움은 바쁜 신학기를 위한 선물이었나 보다.
얼마 전 몇 년째 나가던 학교에서 수업 의뢰가 들어왔다. 수업 시작 전까지 1-2주 정도밖에 안 남아 의뢰한 수업 주제로 책을 급하게 고르고 수업을 계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달 주말 1번씩 지역사회에 토론 봉사하는 토론 모임에서도 3월 넷째 주부터 수업이 진행되기로 확정되었다. 그에 따라 동료 선생님들과 정기적으로 저녁마다 모여 같이 수업계획을 짜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요즘 하루 일과는 금방 지나갔다. 읽고 싶은 책들과 듣고 싶은 강의들도 많고, 쓰고 싶은 이야기도 다양하지만 언제 진득하게 내 시간을 쓸 수 있을지 잘 가늠이 안 갔다.
가끔 남편은 푸념조로 말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수업 자료며, 시간이며, 경험들이 많은데도 왜 맨날 다른 수업들을 듣고 책을 읽고 수업 자료를 만드느라 밤을 새우느냐고. 왜 그럴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기존의 수업 자료들을 잘 ‘복사’하고 ‘붙여서’ 사용하면 훨씬 시간이 절약되고, 좀 더 많은 수업들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했던 수업이고 자료들이기에 다시 한다면 더 능숙하고 쉽게 수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난 매일 새로운 책을 읽고 수업 자료를 매일 밤새우며 만드는 것일까?
이 고민은 스스로도 계속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기존의 자료들을 새롭게 고치고 다듬어서 그 부분의 수업만큼은 완벽하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매일 새롭게 공부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매 수업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너무 빨리 변해가는 요즘 분위기를 따라가기가 너무 버겁다. 원래 성향 자체가 새로운 것들을 보면 빨리 받아들이기보다는 먼저 의심하고 가장 나중에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편이라 먼 미래에는 ‘살아있는 화석’처럼 생존할까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매번 수업을 준비할 때 조금이라도 새롭게, 조금이라도 다르게 자료들을 넣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수업에서 얻었던 피드백들, 고칠 점들, 그리고 새롭게 알려주고 싶은 정보들, 각 수업마다 다시 채워야 할 자료들이 가득이다. 사실 기존의 자료를 살짝 바꿔서 활용하면 수업 준비는 편하다. 내 시간을 좀 더 활용할 수도 있고 다른 수업들을 늘릴 수도 있다. 그런 유혹을 느낄 때마다 생각해 본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일까?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때마다 내 안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빨리빨리 증후군’을 경계한다. 스스로 정한 나만의 가치와 기준과 상관없이 주변의 빠른 압박으로 대충 끼워 맞춘 자료들과 글들은 박제되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나의 능력과 상황보다 너무 많은 일들을 만들지 말고, 이미 맡은 일들은 두 번 세 번 점검하여 후회 없이 처리하고 싶다.
존 스타인백은
"매일의 할당량을 마치기 위해 서두르는 나를 발견한다. 이것은 파괴적인 징후다. 책은 매우 섬세한 것이다. 책에 압박이 가해지면 읽는 이도 압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라고 말했다.
서두름과 압박은 누구에게 좋지 않다. 선택과 집중으로 자기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이미 많은 일들을 신청했을 때는 어떻게 할까? 이미 일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명목으로 기존의 일들을 그냥 포기하면 그것 은 ‘회피’가 되지 않을까? 새삼, ‘선택’이라는 말이 ‘회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뭐니 뭐니 해도 일과 시간과 역량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미 선택한 일에는 '빨리빨리 증후군'에 굴복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며 회피하지 않기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