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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Mar 13. 2022

느린 글쓰기

 미국의 작가이자 영문학자, 교수인 루이즈 디살보는 세계 작가들의 글쓰기 형태를 연구했다. 그런 그녀가 글쓰기를 느림과 비교하며 ‘느린 글쓰기는 명상적 행위이다’라고 한 말이 참 인상적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긴 시간의 느림이 필요’(출처: 이브 매리엄의 시, 게으른 생각)한데, 요즘 이 말을 자주 잊고 지낸다. 바쁘다는 핑계로 예전에는 가족들과 마실 삼아 나갔던 주말 장보기가 ‘로켓 배송’으로 바뀐 지 오래다. 식탁에서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먹던 밥도 요즘은 아주 간단하게 먹는 메뉴로 바꾸었다. 스스로 정한 ‘효율성’, ‘시간 절약’이라는 말로 느림의 미학을 모두 잡아먹어 버린 셈이다.


 예전에 식사 메뉴와 관련된 문제로 남편과 논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당시 매끼 먹는 밥의 주된 성격을 ‘영양소 공급’과 ‘끼니 때우기’라고 주장했고, 남편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과 ‘맛있는 밥’이라고 말했다. ‘밥’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너무 다르다 보니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무겁고 불편한 분위기가 식탁 위를 맴돌았다. 코로나 이후 매번 밥을 차리기가 힘들었던 나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영양소를 보충하기를 원했지만,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려는 남편은 맛깔난 음식들로 행복한 추억을 쌓고 싶어 했다. 나는 ‘밥’이 가진 최소한의 기능에 충실해지고 싶었고, 남편은 ‘밥’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밥을 먹는 문제에서도 ‘느림’과 ‘빠름’의 가치들은 치열하게 자기주장을 하며 맞붙었다.


 루이즈 디살보의 ‘느린 글쓰기는 명상적 행위이다’라는 말은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창작 입문 교실을 신청하면 항상 작가님이 묻는 비슷한 질문이 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어서 오셨어요?”

 일반적인 수업에서 강사들은 수강생들이 어떤 기대사항이 있는지 먼저 묻고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창작 교실 강좌는 좀 다르다. 작가가 수강생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키기보다는 그들의 수많은 경험 속에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먼저 묻는다. 작가는 본인의 수업을 신청한 사람들이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작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며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인생 경험을 듣고 싶어 한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혹은 ‘술술 써지는 글쓰기’만 염두에 두고 수업을 신청한 사람들은 그 첫 질문을 받고 나면 처음에는 무척 당황한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 사람들이 본인이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찾고 쓰는 순간이 바로 진정한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궤적이 다르고 그 삶들은 하나같이 각각 빛나고 아름답다.


 나 역시도 첫 시간에 그 질문을 받고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까지 어떤 내용을 말하고 싶어 글쓰기에 매달려 있는지 참 궁금했다. 길을 걸어가던 순간에도, 꿈을 꾸는 순간에도, 밥을 먹는 순간에는 그런 내 고민은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졌다. 매번 가장 쓰고 싶은 소재, 주제들은 시시각각 생각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붙잡고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항상 시간이 없었다. 맞다. 글쓰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느리게 쓰는 시간’을 애써 만들라는 말은 글 쓰는 그 시간만큼은 ‘글 쓰는 자아’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내가 모든 일을 멈추고 홀로 있는 그 시간만큼은 글을 쓰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라는 말이다. ‘탁탁’ 거리는 키보드의 자판 소리들을 들으며 내 생각의 흐름을 글로 묶어 두고 다시 한번 살펴본다. ‘느린 글쓰기’는 빠른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매일 조금씩, 일정하게 쓰다 보면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글과 내가 만들어 내는 세상과 즐겁게 만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까지 지치지 말고 열심히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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