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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20. 2022

코로나 팬데믹이 만든 요즘 사춘기 아이들

어린 시절, 가장 듣기 싫었던 말 중의 하나는 “너희가 지금 얼마나 좋은 시절에 태어났는지 아니?”라는 부모님의 반복적인 잔소리였다. 나를 포함한 형제들이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부모님은 어김없이 예전의 힘들었던 경험을 말씀하시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종용하셨다. 소 몰고 학교를 다녀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학교 급사 일을 하면서 학교를 계속 다녔다는 이야기 등등, 하루도 빠짐없이 매끼 식사 때마다 듣는 부모님의 고생담이 싫기만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고 너무 무서웠고 엄격했다.


 나이가 조금씩 들고 보니,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형성되는 것을 많이 느낀다. 사람들이 겪어온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고민거리와 생각들이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다. 스무 살 때 맞이한 대학의 분위기는 느슨한 개인주의였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학생운동은 급격히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엄격한 선후배 문화에 대놓고 반발을 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같이’보다는 ‘혼자’를 원했고, ‘사회 이슈’를 위한 토론보다는 ‘개인의 성취’가 중요했던 새내기 시절, 대학 선배들은 이런 우리들을 보면 ‘이상한 아이들’이라며 ‘X세대’라고 불렀다. 이런 자유로운 사고방식 뒤에는 부모님 세대보다 풍족했던 사춘기 시절의 경제상황이 뒷받침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들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 없이 오직 생존만을 위해 달려온 세대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일본 식민지와 6.25 전쟁과 함께 보냈고,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 한 몸을 추스르기도 바빴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사춘기 시절, 당연히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미래의 고민들을 모두 미룬 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을 것이다. 때때로 북한의 전쟁 위협을 받으며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홀로 분투하는 사자’의 심정으로 그 힘든 과정을 견디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사춘기 자식들의 예민한 감정 변화, 걱정들은 섬세한 감정을 빼앗긴 채 사춘기 시절을 보낸 부모님들에게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2022년 4월 18일, '팬데믹'의 상징이 됐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1개월여 만에 완전히 폐지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감염 통제 조치 또는 캠페인이다. 사적 모임 제한과 영업시간 제한 등의 조치에 따라 일상의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가장 많이 바꾼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마음이다. 부모님들이 겪었던 몇십 년의 기간도 아닌 거의 삼 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간은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다방면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생각했던 것은 오로지 ‘생존’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가 무서웠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 직접 만나 음식을 받으며 배달 기사 분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건네기보다는 ‘문 앞에 두고 가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줌으로 만나는 회의와 수업을 선호했고 사람들의 경조사를 비대면 메시지로 챙겼다. ‘마스크 한 장’을 생명줄 인양 사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외출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손을 씻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그렇게 보낸 3년, 그 시절에 느낀 사람의 인생은 가냘픈 코로나라는 거미줄 위에 붙잡힌 벌레의 삶과 같았고, 언제 바이러스에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 매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와는 좀 다르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한 둘째도 혼란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녀석은 2020년 6월에야 비로소 처음 중학교에 갔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닌 상태로 온라인 수업과 오프라인 수업을 반복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둘째는 중학교 생활을 즐기다 팬데믹 상황을 맞은 형과 달리, 중학교 생활과 동아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멋도 모르는 상태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코로나 바다를 온몸으로 맞으며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다. 선생님의 얼굴도 잘 모르는 체로 중1, 중2를 보냈고 이제 중3이 되었다. 매번 “학교 가기 힘들다. 학교 가기 싫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온라인 수업만 하고 싶다”라고 투덜대었다. 사람과의 만남이 그립고 보고픈 어른들과 선배들에 비해 그 녀석은 이제 디지털 세상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점점 익숙해졌다.


 이제야 끝이 보이는 ‘코로나 팬데믹’, 3년 동안의 긴 펜데믹 동굴에서 빠져나와 이제라도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코로나 판데믹과 함께 소중한 사춘기 시절을 보낸 둘째 녀석과 같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른들은 ‘온라인 수업’ 때문에 아이들의 학업 성적이 낮아졌다고 툴툴대지만, 아이들의 모자람만을 탓하기에는 시대가 만든 죄가 너무 크다. 6.25와 일제 강점기로 인해 각박해진 기성세대들을 원망할 수 없듯이, 코로나 상황으로 온라인 세계에 중독된 아이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아이들은 사춘기 시절, 어두컴컴한 학교에서 씁쓸한 쑥과 같은 고민과 맵싸한 마늘 같은 현실을 보내며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비로소 성인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 펜데믹 시절을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낸 아이들은 이 고민들을 모두 디지털 세상에서 해결했다.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온라인 수업’이라는 대안이 있었고, 굳이 힘들게 쑥과 마늘을 먹으며 미련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이들 세대는 묵묵히 어른이 되기 위해 인내하는 ‘곰’이 아니라 중간에 뛰쳐나간 ‘호랑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코로나 펜데믹이 끝나고 우리가 익히 알던 세상으로 돌아갈 때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친구들과 부대끼며 ‘곰’처럼 학교에서 고민하며 어른으로 성장할 중요한 시기 말이다. 차가운 모니터와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코로나 팬데믹 아이들, 우리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또 다른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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