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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18. 2022

어린 마음의 기억

 문득 며칠 전 한 선생님이 한 말이 생각난다. 그 선생님은 전날 참여했던 한 젊은 작가의 온라인 강의에 대해 한참을 말하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젊고 예쁘고 똑똑하고 무엇보다 너무 밝아서 보기 좋았어요. 항상 사랑만 받고 자란 사람처럼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더군요. 부러웠어요.”

 사실 잘 언급은 하지 않지만, 내심 그 선생님이 '어린 시절, 엄한 친정아버지 때문에 좀 힘들었겠구나,' 라고 짐작하곤 했다.


 가끔 사람들을 볼 때면 겉으로는 이미 아이도 있고 남편도 있고 돈 버는 직장이 있는 멋진 성인인데도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 슬며시 비춰 보일 때가 있다. 잘하고 있는지 항상 확인받고 싶어 하는 그 선생님의 마음 뒤에는 그녀의 엄격한 아버지의 잣대가 보였다. 매사 자신만만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남편의 고집 뒤에는 시어머님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이 엿보였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항상 불안해하는 동생의 마음에는 어린 시절 무서웠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생에게도 나에게도.


 내가 어릴 때 대부분 부모는 모두 삶에 힘겨웠고 너무나 바빴다. 지금처럼 아이들의 기분, 생각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며 신경 쓰기보다는 오로지 가족들의 먹을 것을 건사하기도 벅찼다. 모든 부모가 잘살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던 숨 가쁜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린 자식들의 섬세한 감정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권위와 규율이 우선인 시기였다. 그 시기 나는 항상 말없이 순종했고 웬만하면 입을 닫았다. 어른이 된 후 다른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몇몇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내심 안심하곤 했다. 하지만 경험이 비슷하다고 그때 느낀 감정조차 다 같을 수는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술 취한 성인 남자를 보면 두렵다.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잠재적인 두려움인지, 갑작스레 생긴 무서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목청을 높이는 성인 남자, 특히 술을 먹은 성인 남자를 보면 내심 두려움에 떨곤 했다. 이건 사랑하는 남편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온다고 하면 유달리 예민하게 반응했다. 술을 즐기는 남편은 그런 내가 너무 유난스럽다며 매번 불평했지만, 나 역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적당히 마시는 술자리는 괜찮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너무 무서웠다.


 얼마 전,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친정아버지는 평소 술을 마시며 그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풀곤 했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은 매번 우리 집은 비상이었던 것 같다. 동생은 그때의 기억을 너무도 생생히 묘사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누군가 내 기억에서 그 시절만 싹둑 잘라 버린 것처럼, 하얀 백지상태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여전히 그 일들을 기억하는 것인지, 술 취한 가까운 남자, 특히 남편을 보면 괜스레 불안해하곤 했다. 그런 영향으로 나는 특히 남편에게 내 속내를 온전히 비치며 큰 소리 내기가 쉽지 않다. 그냥 혼자 툴툴거리다 꾹꾹 눌러 참고 까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감정의 찌꺼기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동생들이, 친구들이 남편에게 큰소리를 치며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신기하다. 때때로 어린 마음의 기억은 내 입과 소리의 족쇄가 되어 말문을 닫아 버린다.


 여동생은 가끔 그런다.

 “아빠는 우리에게 왜 그랬을까? 난 여전히 아빠가 이해가 안 돼. 내 애를 키우니까 더 말이지. 지금 이렇게 내 아이를 보면 너무 소중해서 도저히 그렇게 못 할 것 같은데….”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린 마음의 기억은 계속 다 커 버린 성인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나 역시도 그때의 아빠,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를 지나고 있을 그 시절의 중년 아빠를 완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 그저 많이 힘드셨겠구나, 험난한 삶의 파도에 지쳐 그랬겠구나, 그렇게 어렴풋이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다.


 소설가 김형경이 쓴 심리에세이, <사람 풍경>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안락한 삶의 기본 조건이어야 하는 아빠가 그때 이미 고통과 분노와 도망치고 싶은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 아이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것이다.


  얼마 전, 둘째에게 모진 말을 했다. 자꾸만 매일 공부 대신 게임에, 유튜브 영상이 보는 아들이 답답해서 내 딴에는 아이를 위해 한 말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그 말들을 묵묵히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이후 아이는 당당히 내놓고 하던 게임을 몰래 숨어서 한다. 아이를 생각해서 한 말들은 아이의 마음에 가시처럼 얼마나 생채기를 냈을까? 내 말들은 둘째의 기억 속에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그래도 둘째는 오늘 씩씩하게 웃으며 집을 나섰다. 사춘기라 이런저런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을 텐데도 눈과 행동에는 엄마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득하다. 내가 어린 시절, 매 순간 가졌던 공포와 불안함이 아니라 아이의 눈에는 여전히 부모를 향한 따뜻한 애정이 넘쳐흐른다. 그래서 난 아이가 가끔 던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속내가 너무 듣기 좋다. 우리 애들이 부모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 느껴져서 말이다.

 ‘그래도 엄마가 편하구나.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구나.’

앞으로 살아갈 험난한 세상, 우리 아이들도 무한한 애정만 받고 자란 사람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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