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2월 어느 날 아빠와 큰 갈등이 있고 난 후 몇 번의 어긋남 속에서 건 정말 오랜만의 통화였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왜?”라고 짧고 무뚝뚝하게 물으셨고, 나는 평상시처럼 “그냥요”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잠시 할 말 찾는 양 머뭇거리시더니 덧붙이셨다. “별일 없니?” 나는 안다. 이때 엄마의 ‘별일 없니’라는 말씀은 정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별일 없어요”라고 말하고는 묵묵히 엄마가 물어보시는 동생들의 최근 근황에 관해 답하곤 했다. 오늘은 그런 대답과는 다르게 말했다. “요즘 큰애 아빠가 재택근무를 자주 해서 힘들어요.” 반은 농담, 반은 어리광으로 한 말이었다. 그냥 오랜만에 엄마랑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건넨 그런 투정 말이다. 그러자 엄마는 무뚝뚝하게 반응하셨다. “너희 둘의 문제는 둘이서 해결해라.” 그렇게 그 말씀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예전부터 나와 엄마의 관계는 보통 모녀와는 조금 달랐다. 엄마는 매번 바빠 보였고 딸인 나와 길게 수다를 떠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엄마와의 통화는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왜?”, “별일 없니”로 시작해서 “그냥요,” “별일 없어요.”라는 대답은 일상 회화처럼 지금껏 계속되었고, 그 외의 말들은 통화 내용에 오르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꼭 뭔가를 해치우듯이 자식들을 키웠고, 오빠를 제외한 다른 자식들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식들이 그 자리, 그곳에 있으면서 애써 만들어 놓은 가정의 평화를 깨지 않았으면 했다. 특출 나게 뛰어난 오빠, 성격이 괄괄한 동생, 사랑만 받고 자란 귀한 막내 사이에서 나는 너무나 평범했고 눈에 띄지 않았다. 가족 내에서 나의 자리는 장녀였지만, 가족의 평화를 위해 인내해야 했고 엄마의 마음을 언제나 먼저 헤아려야 하는 위치였다.
늘 조용했던 딸이, 늘 착했던 딸이 아빠께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 날, 가족들은 저마다 나에게 시끄럽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야 어떻든 참으라고 말했고, 네 마음을 이해하지만, 지금은 아빠께 머리를 숙이라고 말했다. 나만 참았으면 조용히 지나갔을 일을 왜 크게 일을 만드냐고 앞다투어 말했다. 늘 변함없던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갈 때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결국 분노를 표출한다. 지금까지 안 그랬으면서 왜 인제 와서 그러냐고 화를 낸다. ‘그런 마음이었으면 진작에 이야기했어야지’라며 과거의 용기 없던 사람의 모습을 비난한다. 하지만 사람을 향한 분노와 감정표현도 상대방이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어설픈 주장과 분노는 귀찮은 모기의 앵앵거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난 항상 가족들에게는 간절한 속내를 쉽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말이든 표정이든 글이든 모든 것이 말이다. 이따금 내쉬는 긴 한숨, 툴툴거림, 짜증 외에 가족들 앞에 앉아서 건네는 진실한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솔직한 내 마음에 족쇄를 채웠다. 사랑하는 가족들이기에 건네는 말 한마디, 감정표현들이 더 큰 상처와 아픔으로 되돌아올까 봐 항상 두려웠다. 이따금 남편은 말보다는 글이 더 유창하니 글로 감정을 표현해 보라고 했지만, 그건 말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였다. 만약 내가 어떤 이에게 말이 어색하고 어눌하다면 그건 내 마음의 빗장이 쏟아지는 말들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기에 더 속내를 꺼내기가 어려웠고 무서웠다. 가끔은 내 말의 반응은 마음의 떨림보다 너무 느렸다.
가족 중에서 내가 가장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이다. 아이들만은 언제나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 말을 마냥 비난하거나 이상한 의도로 듣지 않고, 분석하지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만큼은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다. 솔직히 그 녀석들은 내 말과 현재 마음 상태에 큰 관심이 없다. 그냥 엄마니까 쏟아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멍을 때리면서 듣고 있는 것이다. 망부석처럼, 제주도에 널려있는 돌하르방처럼 말이다. 나 역시도 아이들을 대할 때만큼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그곳에 있어 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내 편이다.
아이들과의 대화를 생각해 본다. 나도 아이들에게 “별일 없니?”라는 질문을 종종 던진다. 하지만 나의 질문은 아이들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별일 있다면 ‘언제든 엄마가 그 고민을 들어줄게’라는 관심도 섞인 질문이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향해 짜증도 내다가 바로 이런저런 수다를 털어놓는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은 엄마를 편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츤데레’는 속은 안 그런데 겉으로는 표현을 못 하는 사람이다. 가끔 이런 사람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애정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만 통한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으로만 좋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다. 속내는 숨기고 일이 있어도 없는 척 말이다. 어쩌면 앞으로 한동안 “별일 없냐”라고 묻는 엄마에게 기계처럼 “별일이 없다”라고만 대답할 것 같다. 적어도 엄마는 그런 대답만을 원하실 테니까. 만약, 우리 아이들이 나처럼 기계처럼 말한다면 어떻게 할까? 난 아마도 매일매일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엄마도, 그런 나를 궁금해할까?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