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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 기본이 주는 무거움

by 하늘진주

밥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물질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흰쌀과 잡곡을 적당히 섞어 씻고 손등에 맞춰 까만 밥솥에 물을 넣는다. 씻기는 동안 사방으로 요동치던 흰쌀과 잡곡이 물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는다. 가족들이 먹을 주식이 든 내솥을 들고 있자니 제법 무겁다. 발걸음마다 쌀과 잡곡과 콩들이 또다시 출렁출렁 움직인다. 들고 있던 취사 솥을 전기밥솥 안에 넣자 내 움직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던 쌀과 잡곡들이 얌전히 가라앉는다. 한 치 앞도 모르고 고요해진 하얗고 노란 내용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바로 취사 버튼을 누른다. 앞으로 40분 뒤, 딱딱하고 퍽퍽한 맛만을 풍겼던 쌀과 곡식들은 높은 열기와 물과, 압력으로 우리 가족들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촉촉한 맛을 지닌 주식으로 바뀔 것이다.


몇 분이 지나자 조금씩 ‘치직치직’ 거리는 소리를 내던 전기밥솥에서 드디어 추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제 본질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생쌀이 뜨거운 열기와 압력에 굴복해 밥으로 변해간다. 쌀이 밥으로 변해갈수록 구수하고 추억을 자아내는 냄새가 코끝에 자욱하다. 이미 먹어본 맛이지만 밥 짓는 향이 진해질수록 입안에서 침이 감돈다. 하얗고 구수한 콩이 곁들어 있는 잡곡밥, 지금, 이 순간 빨간 김치 하나만 있어도 밥이 술술 넘어갈 것 같다.


밥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주식이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 때부터 잡곡은 우리 선조들의 밥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이 시기는 밭농사를 주로 지었기에 주로 보리나 피, 좁쌀과 같은 밭 잡물을 먹었다. 쌀은 논농사가 널리 퍼지기 이전까지 왕족, 귀족, 관료들이 없는 지배층들의 주식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조세 납부의 대상이었다. 서양의 곱고 하얀 빵이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던 것처럼 기름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은 우리나라 계급층들의 특권이었다. 그런 과거를 가진 탓인지, 쌀을 생각하면 고고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밥하기는 요리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밥하는 방법 역시 복잡하지도 않다. 쌀을 찬물에 적당히 씻다가 불순물을 제거한 후, 본인의 손등에 맞춰 밥물을 잘 맞추면 된다. 이 정도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밥하기 준비는 끝났다. 특히 가스레인지에 솥으로 밥 짓기가 아닌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는 경우는 ‘식은 밥 먹기’처럼 쉽다. 씻은 쌀이 든 내솥을 전기밥솥에 넣고 전기 코드만 꽂으면 알아서 온도를 높였다가 내리며 요리해 주니 계속 보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밥맛이 달라지니 신통방통할 노릇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유달리 밥맛에 집착했다. 어머니가 쌀을 잘 씻고 신중하게 밥물을 맞혀도 항상 밥맛은 그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매번 쌀이 설익었니, 퍽퍽하니, 찰기가 없다며 툴툴거리며 숟가락을 드셨다. 그런 그의 불만은 자연스레 반찬 투정으로 이어지곤 했다. 어린 내 입맛에는 맛만 좋은 반찬들이 그런 아버지의 투정을 듣고 나면 자연스레 ‘그런가?’라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 사춘기 때 나는 매번 밥맛을 맞추려 애쓰시던 어머니를 바라보며 유난스러운 아버지의 입맛과 더불어 가부장적인 모습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토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쌀에 물만 넣으면 자연스레 밥이 완성한다는 마법의 전기밥솥 앞에서 매번 긴장한다. 이번에는 어떤 밥이 나올까? 고슬고슬한 밥? 아니면 촉촉한 진밥?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밥은 고슬고슬한 밥이다. 물기가 별로 없고 입에 넣으면 넣을수록 고슬고슬 굴러다니는 밥이 참 좋다. 씹어도 진득하게 이빨에 끼지 않아서 좋고, 빨간 고추장이나 까만 간장에 쓱쓱 비벼 먹으면 제각각의 존재감을 자랑하며 입안에 춤추는 것이 재미있다. 반면 남편이 좋아하는 밥은 물이 촉촉하게 들어간 진밥이다. 거의 죽처럼 물렁물렁해서 입에 넣으면 술술 넘어간다. 밥은 한가득 입에 넣고 뒤늦게 반찬을 먹으면 촉촉해진 밥알의 풀기로 반찬들을 꽁꽁 감싼 채 입안으로 넘어간다. 제각각의 음식들이 통통 튀지도 않고 촉촉한 밥의 묵직한 물기에 휩싸여 통일감 있게 하나 되어 넘어간다.


밥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본 주식이다. 요즘은 빵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밥은 속 편한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개념이 때로는 무섭다. 아무리 화려하게 요리된 음식도 기본이 잘못되면 왕창 망한다. 곱슬하게 지은 밥은 볶은밥에 어울리고, 여러 나물과 비벼 먹는 밥은 촉촉한 밥이 내 입맛에 맞다. 기본이 중요하지만, 이 기본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니 더 힘들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눈앞에 보이지 않는 허상에 대해서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화려하고 속이 빈 강정과 같은 삶, 부, 명예 등등….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함께 있는 사람들이다. 기본 중의 기본인 사람들, 상황과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이지만 내 인생의 밥과 같은 존재들이다. 오늘은 고슬고슬한 밥, 내일은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진밥, 앞으로도 계속 실패하고 도전하고, 그렇게 내 인생의 밥 짓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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