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를 중심으로 예술가의 삶과 광기를 수려한 문장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예술가의 삶,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천재의 삶은 그다지 녹록지 않은지 그가 걸어가는 인생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찰스의 삶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그가 꼭 불행을 불러오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에는 여러 모습의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그가 버린 첫 번째 아내부터, 블란치 부인, 더크 스트로브, 아타 등등 그 주변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속물적이면서 현실적이고, 사랑에 목말라 있으면서 아픈 과거가 있고,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고 헌신적이다. 소설가가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인물 캐릭터들이, 현실 속에서 예술가 주변에 존재할 뻔한 사람들을 싹싹 긁어모아 <달과 6펜스> 속에 넣어둔 느낌이다. 이처럼 개성 넘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보면 볼수록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 바로 더크 스트로브다.
그는 찰스의 천재성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다. 더크 역시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지만 찰스 앞에서는 더없이 본인의 작품을 낮추고 그의 작품들을 더없이 추앙한다. 더크가 사랑하는 아내, 블란치 부인조차 알아주지도 인정해 주지도 않는 찰스의 그림이지만, 오직 더크만은 그 그림들을 보며 행복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 역시도 화가이면서 다른 사람의 재능과 작품을 인정하기가 쉬웠을까? 더크는 마냥 착하기만 ‘호구’였던 가? 아니면 미리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버린 ‘포기자’였던가?
찰스의 작품에 대한 더크의 맹목적인 추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서 더 두드러진다. 그는 작품에서 병에 걸린 찰스를 데리고 와 간호하다가 배신을 겪는다. 그의 부인 블란치는 찰스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자살한다. 그 과정에서 더크는 어떤 변명도 찰스에게서 듣지 못했다. 스튜디오를 찾은 더크는 자신의 누드화를 발견한다. 찰스가 그린 그림을 깨닫고 분노와 슬픔에 치밀어 그림을 훼손시키려 하다가도 결국 포기한다. ‘하마터면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뻔’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말이다.
<달과 6펜스>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을 감도는 생각은 더크의 모습이다. 내가 만일 더크였다면, 그의 비극적인 사건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맹목적으로 찰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내가 하는 분야에서 유독 재능이 빛나는 사람들 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날마다 이뤄가는 성취를 축하하며 사심 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 곁에는 여러 명의 천재가 있었다. 역사는 오로지 빛나는 재능을 가진 천재들, 승리자들만 기억할 뿐, 그 주변의 인물들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인물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다. 항상 모차르트의 곁에서 시기와 질투를 일삼던 그 쪼잔한 인물로 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서 살리에리 역시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었고 빛나는 작품을 추구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을 시작하고 어설프게 익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기만의 울타리에 쉽게 빠진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고 인정하던 사람도 점점 ‘나만의 방법, 행동’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 앞에서 훈수를 두기도 하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의 업적을 애써 무시하며 자기만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넘볼 수 없는 업적은 원래 먹을 수 없는 ‘신포도’처럼 취급하며 때로는 자신이 시기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를 깎아내리며 자신의 모습을 부각하기 급급하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알게 모르게 이런 행동을 보일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재능 때문에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이 싫었다.
원하고 잘하고 싶은 길 앞에서 내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이미 눈에 보이는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가 질투가 났다가 결국 재능 부족을 탓하며 나 자신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저 사람들은 원래부터 가능성이 풍부했을 거야.’, ‘그 사람들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지.’라며 나약한 의지와 노력 부족을 자꾸만 합리화시킨다. 그러다 질리면 새로이 다짐하며 ‘한번 해보자’라고 마음을 먹는다. 내가 목표한 완벽한 결과로 가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렇게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쉽게 잡을 수 없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쉽게 마음속에서 번아웃과 포기가 커다란 파도처럼 물결친다. 남을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성장으로 가는 지름길일 텐데 말이다.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소설 속의 더크는 참 불쌍하고 지질한 인물이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남다른 포용성과 심미안은 무척 놀랍기만 하다. 이 인물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사심 없이 무한한 애정과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나는 이 사심 없는 사람, 더크의 또 다른 성공기를 상상해 본다.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평범한 재능에 주눅 들지 않고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빛나는 성공을 잡아채는 모습도 멋지지 않은가. 오늘도 개미처럼 묵묵히 할 일을 하며 나만의 성공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