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일정이 끝나고 집에 들어갔더니 소파에 벌러덩 누워있던 두 남정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 대뜸 소리쳤다.
"어,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늦게 오신다면서요. “
‘일찍이라고? 내 집에, 지금 들어오는 것도 문제냐?’
흘낏 시계를 보니 저녁 8시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부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미안한 듯 말을 꺼냈다. 내가 늦게 올 줄 알고 모 브랜드의 치킨을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는 둘째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치킨이 엄마가 싫어하는 프라이드 양념이에요. “
평소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는 탓에 오븐치킨이나 숯불 양념치킨만 줄기차게 주문했었다. 이 메뉴들은 가족들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내 취향이 많이 반영된 음식들이었다. 특히 둘째는 평소 기름기 가득한 치킨만을 외치며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런 부자가 내가 없는 틈에 모처럼의 일탈을 꿈꿨는데, 예상보다 빠른 내 귀가 시간 때문에 완전범죄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족들은 평소에 내 의견과 감정을 우선하며 잘 맞춰줬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인 집, 혹시나 자신들의 무신경함이 혼자인 나를 상처 입히지 않을까, 어떤 일에도 무덤덤한 그들이 공감 못 해주는 일 때문에 내가 외롭지 않을까, 우리 집 남자들은 매번 그렇게 나를 신경 써 줬다.
비 오는 날, 괜히 감성에 젖어 카페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나를 위해 삼부자는 비장한 얼굴로 따라나서곤 했다. 그들은 10분 만에 주문한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우고는 지루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이제 가자”라는 말을 엄청나게 기다리면서도 막상 가려고 하면 “더 있어도 되는데”라며 입바른 말을 해주곤 했다. 또, 삼 부자는 속이 부대껴 야식을 잘 안 먹는 내가 잠들기를 숨죽여 기다렸다가 밤 10시면 조용히 모여 치킨을 시켜 먹기도 했다. 매번 당신들과 의견이 다른 나를 향해 짜증 섞인 투정도, ‘왜 안 되냐’라고 한번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가끔 가족들은 우리 집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풍성한 집이라고 일컬었다.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집이 아니라 '민주가 주인이 되는 집' 말이다. 그들은 내 이름 석 자를 따서 이런 농담을 해댔다. “어떤 의견이든 엄마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어차피 우리 집은 민주주의니까요.” 사실 그건 그들이 나를 위한 엄청난 배려였다.
물론, 나 역시도 그런 가족들을 위해 양보하는 것이 많다. 온종일 피곤하고 아무리 바빠도 가족들의 식사를 꼭 챙기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배달을 시켜 먹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밖에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경우는 꼭 포장해서 그 맛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곤 했다.
또 어떨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세 남정네의 반응 때문에 혼자 씩씩거렸다가 짜증을 내며 잠들기도 했다. 위로받으려고 털어놓았던 투정이 냉정한 문제 파악과 해결책으로 돌아왔다. 앞일에 대한 내 걱정은 느긋한 그들에게만 가면 유난스러운 호들갑으로 바뀌었다. ‘서로가 너무 다르다’라고 툴툴거리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결국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가족은 전래 동화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처럼 조금씩 양보의 볏짚을 매일 주고받으며 산다.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 또 다른 인연을 탄생시켰다. 생명의 묵직함 때문에 겁도 나고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다. 아주 진하디 진한 인연의 실로 연결이 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가족들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든든하고 안심이 되고, 이런 존재가 바로 가족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