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눈을 반짝이는 '보헤미안 집시'의 모습이 생각난다. 때로는 열정적이면서 세상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 말이다. 그에 반해, '계획적'이라는 말은 세심하고 빈틈이 없으면서 여유 있는 '고수'의 모습이다.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그 단어에서 넘쳐흐른다. 이런 모습들이 적절히 잘 섞인 채 내 삶을 녹아들면 좋으련만, 현실 속의 난, 매번 즉흥이라는 폭탄이 만든 잔해 속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패잔병이다.
또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우아하고 커피를 홀짝이며 여유 있게 시간을 관조하던 지난날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여기저기 날아오는 전화와 문자들을 확인하며 내 마음도 매시간 쫀득쫀득하게 계속 쪼이고 있다. 내일까지 해야 하는 일들, 매일 해야 하는 일들, 오늘 넘겨야 하는 일들이 풍선처럼 자꾸만 부푼다. 분명 나에게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노트북의 타자를 치느라 목과 어깨가 점점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또다시 예전의 방만하고 게을렀던 과거의 나를 원망한다.
분명히 나에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매일 벌어지는 하루 일 중에서 쪼개고 잘 끼워 넣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여유가 생기면 왜 이렇게 놀 생각밖에 안 나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방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책들이 유난히 읽고 싶고, 보통 때는 보이지 않던 집안의 구석구석 먼지들과 얼룩들이 자꾸만 눈에 띄어 어느 순간 걸레를 들고서 ‘박박’ 문지르고 있다. ‘놀고 싶은 마음’과 ‘하기 싫은 마음’이 짬뽕이 되어 마음속에서 난리 블루스를 추고 있다.
매일매일을 계획적인 마음으로 일들을 차근차근 일을 해냈다면 이미 ‘생활의 도인’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을 것이다. ‘놀고 싶은 유혹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이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눈앞에서 흔들어 댈 것이다. 천성이 게으르면서 ‘부지런한 삶’을 숨 가쁘게 허덕이며 따라가고 있다.
살아갈 때 즉흥적인 천성과 계획적인 천성중 어떤 성향이 더 유용할까? 즉흥적이라는 말은 계획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일을 하고 도전을 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난 즉흥적인 면모에 훨씬 가깝다. 하고 싶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도전을 하고, 하기 싫으면 아무리 좋다고 억지로 끌고 가도 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하려고 하는 편이다. 결과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겉으로,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소처럼’ 원하는 일을 계속하는 편이다. 그런 식으로 진행했던 일들, 만나는 사람들, 지속하고 있는 인연들이 참 많다. 영어 공부도, 독서 모임도, 글쓰기도 뚜렷한 결과는 없지만 몇 년째 계속하고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계획적인 천성이 훨씬 좋을 것 같다. 내 주위에는 뚜렷하게 계획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 잘 못 봤지만, 남편을 보면 그런 천성을 가진 듯싶다. 신랑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섣불리 시작하지 않는다. 항상 앞뒤 결과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꼼꼼하게 계획적으로 일을 설계한다. 여행 일정을 짤 때도 경로와 가족들의 컨디션과 식성에 따라 꼼꼼하게 짠다. 그래서 큰 실패가 없다.
매번 밀린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끝난 후의 안도감을 극단적으로 경험하는 나로서는 계획적인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해 봤다. 다이어리를 사고, 스케줄 앱을 깔고, 시간 알람도 설정해 봤다. 하지만 왜 이렇게 순서 없이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넘쳐나는지…. 쏟아지는 일들이 내 컨디션에 따라 공손하게 노크하며 들어오는 상상을 해 봤다. “잘 쉬셨으면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라고 물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해야 할 일들은 ‘갑’이고, 나는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을’이다. 이 또한 일들이 지나가겠지. 계속 반복되는 생활의 연속이지만, 또 한 번 다짐해 본다. 다음에는 꼭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일을 처리해 보리라고.
앞으로 해야 하는 일 님들, 화나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세요. 이제 곧 조금씩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신경질만 내지 마세요.
잡담은 그만하고, 다시 일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