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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Sep 14. 2022

나의 고3 시절

 “사람들이 독서 토론을 원하는 이유는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말,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생각들을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이다.”라고 내가 아는 누군가가 말했다.  누구나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 이야기들은 살아온 세월만큼 겹겹이 쌓이며 때로는 마음속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가끔은 허심탄회한 대화로 묵은 상처를 훨훨 떨쳐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일상에 지치다 보면 그마저도 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든, 글이든 한번쯤은 본인을 옥죄고 있는 암울한 기억에서 벗어나 속 시원히 풀어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 여정이 꼭꼭 숨겨두었던 아픔을 콕콕 찌르는 시간들이지라도 말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보면 두 아들을 낳고 힘들었던 일, 키우며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반찬 삼아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한민국 수험생들이라면 가장 힘들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고3 시절’만은 이런 해소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그 해 정말 힘들었지?’라며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이미 연락이 끊겼다. 스스로도 그 시절은 ‘내 인생의 암흑기’라며 더 이상 떠올리기를 거부했다. 그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서 계속 스스로를 탓했던 몇 년 뒤의 바보 같은 내 모습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비참하고 무기력했고 바보 같았다.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매일 같이 비참한 현실을 잊어보려고 책들에 파묻혀 살았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오빠와 동시에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집안과 온 동네의 기대주였던 오빠는 고3이었고, 나는 고1이었다. 좋은 머리만 믿고 공부했던 중학교 때의 밑천은 진작에 다 떨어졌다. 오로지 고등학교에서는 순수한 노력으로 성적을 증명할 때였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난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연합고사를 보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던 당시, 난 중3 겨울방학을 슬렁슬렁 놀면서 보냈다. 읽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었고 쉬엄쉬엄 놀면서 그 아까운 시간들을 보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치렀던 고1 첫 시험, 시험결과를 받고 난 후 깨달았다. '아, 이제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시험 범위가 정해지지 않은 수학은 고등학교 내내 내 발목을 잡았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공부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온가족들의 관심은 고3이었던 오빠의 입시에만 쏠려 있었고, 중학교 때에 비해 월등한 성적을 내지 못하는 나는 우리 집안의 ‘loser'(실패자)였다. 시험을 치고 성적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오빠와 확연하게 비교가 되는 성적들은 매번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안에 ’대입재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시절, 대입 시험이 전면 개편이 되었고 나는 수능 1세대가 되었다. 어떤 이는 비운의 세대라고 우리 학년을 칭했지만, 나에게는 그 시험 개편이 또 다른 기회가 되었다. 모순적이게도, 비참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잊어보려 읽었던 만화책들, 소설들은 영어와 국어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총알이 되었다. 요즘 엄마들이 그렇게도 아이들에게 길어주고 싶어 하는 ‘문해력’이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다. 몰래 책상 밑에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은 어떨 때는 아버지의 손에 갈기갈기 찢기기도 하고, 때로는 욕조로 풍덩 빠지기도 했다. 나와 함께 아픈 기억을 같이 했던 책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지 누가 알았으랴? 어쩌면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었던 것은 나에게는 천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당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자 진작 나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선언했다. 대입 원서를 쓸 당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다 그나마 익숙한 ‘국문학과’를 선택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학과, 국문과 말이다. 오빠처럼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법학과도 아니었고, 동생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약학과도 아니었다. 이도저도 아닌 마음으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가득할 것이라 예상한 학과로 도망치며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마감했다.     


 절실하게 공부와 싸워보지도 못한 고3 시절이었다. 성적을 향한 아버지와 신경전은 너무도 피곤했고 무서웠다. 어떻게 공부해야 좋을지 모를 막막함과 무능력한 내 모습에 실망하던 매일이었다. 다시 ‘중3 겨울방학’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만 품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약하고 게으르고, 동생의 표현처럼, ‘의지박약아’의 모습이었다. 자기 미래를 향해 열심히 달려보지도, 노력하지도 않는 불쌍한 사람, 그 모습이 딱 나였다.     


 공부에 힘겨워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종종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얼마나 외로웠니? 얼마나 힘겨웠니?' 매몰찬 입시 현실과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 속에서 힘들어 했던 나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싶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공감, 대화는 모두 그런 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절 아빠의 분노는 나의 괴로움이 되었고 아빠의 성적지상주의는 나의 좌절이 되었다. 혹시 나의 과거가 나의 불안으로, 다시 아이들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매일 힘든 학창 시절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져본다. 나와 같은 아픔을 우리 아이들은 겪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고3,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다. 물론, 이 고등학교 시절이 나머지 인생을 좌우할 만큼 엄청나게 중요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 시절의 성적이 잘 안 나온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을 구박하고 미워할 면죄부를 가진 것은 아니다. 결국 이 고등학교 시절도 모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도, 아이들의 결과가 내 기대에 미치지 않아도, 언제나 아이들을 먼저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기를 마음 속 깊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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