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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Sep 19. 2022

글쓰기가 나에게 던지는 작은 질문들

 질문은 사람의 마음 생각을 종종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질문들은 나름 쉽사리 대답을 떠올릴 수 있는 물음표들이다.

 “밥 먹었니?” “뭐 먹을까?” “어디 놀러 갈까?”

 이런 질문들은 그날그날 상황과 마음에 맞춰, 기분이 내키는 대로 답변하면 된다. 물론 때론 그 질문들이 몇 개의 선택지에서 고민하는 어려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대체로 이런 질문들은 답변을 찾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가끔 “삶은 무엇인가?”, “이 일이 왜 당신에게 중요한가?”와 같은 성격의 질문을 접하면 순간 멈칫한다. 좋은 질문, 있어 보이는 질문이지만 무엇이라고 쉽게 말하기가 참 어렵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은 이와 같은 질문을 ‘큰 질문’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하기에 쉽게 답을 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큰 질문’일수록 ‘작은 이야기’로 쪼개서 ‘작은 질문’으로 묻고 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 나에게 있어 요즘의 ‘큰 질문’은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이다.


 숱한 글쓰기 교실에서 질문받고 답변했던 물음이다. 이상하게도 그 대답은 항상 달랐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라는 커다란 질문은 상황과 마음에 따라 요리조리 헤엄을 쳤다. 어떨 때는 ‘내 속의 답답함을 다 풀어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대답했고, 또 어떨 때는 ‘글을 쓰면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꼭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고 다짐을 할 때도 있었고 ‘굳이 내가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라며 흔들릴 때도 많았다. 요즘은 정말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있다. 쓰고 있는 글의 종류는 다르지만, 모두가 글쓰기의 열풍에 푹 빠져 있다.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 걸까?


 지난 주말,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동화 합평을 가졌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합평 시간에 잘 참여를 못 했다. 하지만, 동화 합평 시간에 꾸준히 참여하신 분은 많은 공모전에 도전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제출된 3편의 동화를 읽고 합평을 하고 있자니, 약간 껄끄러운 점을 발견했다. 그동안 합평에 참여를 잘 안 한 동안, 합평 방식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작품의 부족한 점, 개선할 점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합평 방법이 ‘공모전의 심사위원의 기준에 맞니 안 맞니’로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공모전에 상을 타신 선생님은 ‘동화의 재미’보다는 ‘공모전의 유리함’을 먼저 살폈고, 다른 분의 작품도 그렇게 바꾸기를 종용했다. 초등 고학년이 읽기에는 작품이 너무 교훈적이고 재미가 덜하다고 말해도, 선생님은 이 구성이 공모전에 유리하다며 계속 주장하셨다.


 공모전의 단맛, 그런 달콤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선생님을 보니 좀 씁쓸했다. 물론 아무런 성과 없이 글쓰기를 계속 지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해야 할 일도, 놀거리도,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에 혼자 집에 박혀 글을 쓰고 이야기의 얼개를 짜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마음 깊은 곳에서 서운함과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런 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곱씹어 봤다.


 나는 왜 동화를 쓰려고 하는가? 나는 왜 청소년 소설을 쓰고 싶었을까? 창작의 첫 시작은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 창작의 성격도 조금씩 바뀌었다. 아이들에게 조금 위로를 주고 싶었고 힘이 되고 싶었다. 생활 동화 썼고 판타지 동화도 썼다가 줄기차게 여러 가지 소재로 써댔다. 그러다 청소년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내 소설의 분위기도 어두워졌고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소심한 주인공이 바뀌는 이야기, 곤경에 처했다가 극복하는 이야기 등등, 일상 속에서 흔히 만나는 아이들의 사연이 내 글 속에서 춤을 추었다. 내 글이 아니어도 만날 수 있는 이야기들.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쓸 필요가 있을까? 그 이후부터 글쓰기가 재미가 없었다.


 물론 ‘동화는 이래야 해’, ‘청소년 소설은 이래야 한다’라고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글을 쓰고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학교 폭력’, ‘사춘기의 성장’ 등과 같은 어두침침한 소재를 썼지만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히 청소년 소설은 이런 소재여야 해, 동화는 이런 소재여야 한다는 ‘어른’의 관점으로 아이들의 세상을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 역시도 공모전 입상에 빠진 선생님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다. 새로운 소재를 찾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소재를 중복해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큰 얘기들은 다 똑같아. 큰 얘기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가 전부야. 큰 이야기를 하면 틀린 말이 없어. 지루하지.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거든. 디테일 속에 진실이 있다고.”

 어쩌면 내가 계속해서 동화나 청소년 소설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비슷한 소재를 우려먹는 것은 아이들의 디테일을 발견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관점에서, 의례히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아이들을 내 관점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내 행동에 대한 반성에 앞서 나에게 작은 질문으로 글쓰기에 대한 물음표를 다시 한번 던진다. ‘글을 쓸 때 가장 재미있을 때는 언제였나?’, ‘어떤 글을 쓸 때 가장 즐거웠나?’, ‘어떤 소재로 글을 쓸 때 가장 신이 났나?’


 글을 쓰고 즐거웠을 때는 새로운 인물이 내가 만든 세상에서 춤을 추며 이야기를 펼쳐 나갈 때였다. ‘와, 정말 독특하다.’ ,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지?’라는 반응을 들을 때가 가장 기뻤다. 이제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상상력이 많이 고갈되었지만 말이다. 어릴 때 만들어 두었던 그 세상으로, 여러 번의 비밀번호와 주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나만의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동화와 청소년 소설의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


 글을 쓰기 잘했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하며 위로를 받았다고 이야기할 때였다. 그저 내 속의 내용을 속 시원하게 풀어놓았을 뿐인데 읽은 사람들이 ‘고맙다’라는 표현을 해 줄 때 너무나 행복했다.


 이어령 작가는 ‘사람은 지우개가 달린 연필’이라고 표현한다. ‘연필은 기억하고 남기기 위해 있고, 지우개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있는 것처럼, 요즘 사람들이 글쓰기에 매진하는 것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지우기 위함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쌓였던 마음의 상처들을 조금씩 지우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욕심을 낸다면, 시간 내어 내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사람들과 ‘인생 뭐 별거냐?’라는 마음으로, 함께 웃으며 이 험한 세상을 즐겁게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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