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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29. 2022

올리버 색스의 <온 더 무브>(알마, 2017)

 세상에 둘도 없는 솔직 발칙한 자서전, 올리 색스의 <온 더 무브>(알마, 2017)


 초등학교 이후(사실, 국민학교라고 해야 맞지만) 위인들의 일생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의 내가 읽은 위인전들은 수많은 위인들의 ‘심상치 않은 어린 시절’과 ‘영웅이 겪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그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낸 ‘위대한 업적’들의 나열이었다. 마리 퀴리, 간디, 처칠, 안데르센 등등 그런 인물들의 생애를 보며 괜스레 나의 모습과 비교하기도 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멋진 청사진을 그렸다. 사춘기를 지나고서야 나는 그 인물들과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괜한 자격지심과 삐딱한 마음으로 다른 인물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잘 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올리 색스의 <온 더 무브>(알마, 2017)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인물의 이름도 범상치 않아서 잘못 발음했다가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이름의 주인공, 올리브 색스. 그는 이미 의학계와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에게 꽤 널리 알려진 저명인사였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올버 색스는 베스트셀러 책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이다. 그는 평소 병원에서 만나는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는 경증 환자부터 중증 정신질환 환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썼다. 그런 출중한 글솜씨로 인해 저자는 본업보다 의학계의 시인으로 유명하다. 물론 그의 멋진 문장력 역시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열네 살부터 70살이 넘은 나이까지 1000편이 넘는 일기장을 썼고,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특유의 성실한 글쓰기와 진득한 열정을 토대로 완성된 책이 바로 자서전 <온 더 무브>이다.


 이 책은 총페이지가 468페이지가 달 할 정도로 그 내용이 방대하다. 그가 모터사이클의 스피드에 빠졌던 시절부터 마약과 헬스에 빠졌던 젊은 시절, 남들과 다른 성 정체성으로 가족들에게 외면을 받던 십 대 후반, 조현병에 걸린 형으로 고통받던 잉글랜드의 가족에게서 벗어나 미국에서 신경외과 전문의로 자리를 잡는 모습까지 자서전 속에 표현된 인생 이야기는 발칙하고 솔직하다. 그는 이미 대중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유명인이지만 마약에 대한 자신의 과거를, 동성애에 대한 경험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파란만장했던 과거의 모습을 톰 건의 시, <늑대 소년의 우화>의 한 구절인 ‘슬픈 이중성’을 인용하며 한때 각각 다른 자아로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울프’라는 이름으로 익명의 존재가 되어 일상을 벗어나 모터사이클로 질주를 하기도 하고, 병원에서는 다정한 의사 ‘올리버’가 되어 환자들을 대했다. 저자는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는 날에는 마약에 취해 주말을 보내다 월요일 아침, 다시 헌신적인 의사로 돌아왔다.


 저자는 본인의 성 정체성으로 인한 생겼던 가족들과 불화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의사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많은 기대와 교육을 받았다. 옥스퍼드로 갈 예정이던 18살의 저자는 아버지에 성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 그는 “남자애들을 선호한다”라고 조심스럽게 고백한 후 어머니에게서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p.18)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이런 반응이 “내면에 죄의식”이 생겨 “평생 성적 표현을 억제하게 되었다”(p.20)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어머님의 마음과 상황을 끝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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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남자애들을 선호하니?” 아버지가 물고 늘어졌다.
 “네, 그래요. 하지만 그냥 느낌뿐이에요. 뭔가를 ‘해본’ 적은 없어요.” (중략)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격노한 얼굴로 내려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가증스럽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p.18-19)


 우리 모두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자신이 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랬기에 나는 어머니가 1890년대에 태어났고 정통파 유대교 교육을 받았으며, 1950년대의 잉글랜드는 동성애를 변태 취급할 뿐 아니라 범죄행위로 여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게 잔인하게 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죽어버리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중략) 그러나 어머니의 말은 나의 내면에 죄의식으로 주입되어, 거의 평생 나를 따라다니면서 자유와 환희로 가득해야 했을 성적 표현을 억제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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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훌륭한 신경정신과 의사로 성장했다.

 

 이 책의 상반부의 내용이 젊은 날의 갈등과 성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라면, 하반부에는 진정한 의사로 활동하는 저명한 의사로서의 모습이 부각된다. 출세와 지위에 연연하기보다는 환자에게 한발 다가서는 ‘따뜻한 의사’로서, 기존의 의학계의 규율에 반발하면서 환자들을 위하는 그의 모습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영화처럼, 소설처럼 모든 경험들을  그려내고 있는 유려한 그의 글솜씨다. 저자는 평소 글쓰기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지녔다고 밝혔다. 그는 의뢰받은 한 편의 원고를 일주일에 아홉 번을 고칠 정도의 열의를 지녔다. 저자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 글을 쓰는 동시에 생각을 발견”하며 모든 생각을 다 담으려고 하는 “두툼한 기굴”(p.230)의 글쓰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이 책은  빽빽한 활자의 나열이지만 그럼에도 가독성이 뛰어나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의학적인 용어들과 논문에서 나오는 듯한 각주들만 견디면 의학에 문외한 사람들도 그럭저럭 쉽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자서전의 제목을 톰 건의 시 ‘온 더 무브’에서 따 왔다고 밝혔다. 이 제목처럼 그는 모터 사이클을 즐겼던 젊은 날에서 헌신적인 의사로 거듭나기까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모터 사이클을 타며 빠른 속도로, 때로는 방해물을 맞아 덜커덩 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반성하고, 도전하며 후회하고, 다시 일어서며... 모든 순간을 '온 더 무브'하며 활기차게 움직였다.


 자서전 <온 더 무브>는 의학계에 관심 있는 사람들, 신경정신과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 혹은 글쓰기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성인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니, 사실 많은 성인 독자들이 읽으면 좋지만, 제발 책의 두께를 보고 도망가지 말기를 바란다. ‘나 좀 책을 읽어봤지’하는 사람들, 혹은 ‘의학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는 도전과 같은 책이 될 것이다. 한번 시도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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