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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6. 2022

<갈매기의 죽음, 그 의미를 되새기며>

숭례문학당 낭독극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갈매기의 죽음, 그 의미를 되새기며, 안톤 체흐프의  '갈매기'>



2022년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호기심과 용기가 이어준 인연들의 만남으로 기억될 모양이다. 올해 들어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항상 따뜻하게 나를 바라봐주는 친구들의 도타운 정을 느끼는 것은 덤이다. 평소의 11월이라면 예전과 비슷한 수업들을 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또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아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해는 좀 다르다. 그 활동 중의 하나가 11월 넷째 주 금요일 밤, 숭례문학당에서 진행했던 안톤 체호프의 낭독극, ‘갈매기’이다.


 낭독극에 참여했던 계기는 단순했다. 사실 연극이라면 초등학교 시절, 억지로 했던 역할 활동이 다였다. 연극 공연은 오로지 ‘보기 위한’ 활동이지, ‘연기하는’ 활동이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그저 ‘낭독극’이라는 활동이 무엇일지 궁금해서 용기 있게 배우로 지원했다. 하지만 점점 본 공연 날이 다가올수록 후회와 불안에 휩싸였다. 동시에 같이 공연하는 낭독극 동료 배우들의 진지한 모습에 많은 감명과 열정을 배웠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


 본 공연 전, 연습에 쏟아부은 시간은 총 6번의 만남, 12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만으로는 전문 배우가 아닌지라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틈틈이 바쁜 일과 중 시간을 내어 배역을 연구하고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낭동극’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신청했기에 내 배역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백지’ 상태였다. 왜 인물들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그런 말로 사람의 마음을 할퀴어대는지 모르는 채로 말이다. 이제야 조금씩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찰나에 공연이 끝나버렸다.


 <갈매기>는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4대 장막극으로 불리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중 첫 작품이다. 총 4막으로 구성되어 주요 인물, 작가를 꿈꾸는 꼰스딴찐과 배우를 희망하는 니나의 모습을 위태롭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으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와 ‘꼰스딴찐’이 표현하는 신진 세대의 대립, ‘마샤, 뜨리고린, 니나’ 등 여러 인물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아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


 1막은 꼰스딴찐이 자신의 연인 니나를 주인공으로 야심 차게 준비한 희곡 공연을 올리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공연을 무시하는 어머니 아르까지나와 다른 인물들의 무성의한 태도로 꼰스딴찐은 “막을 내려”라고 화를 내며 연극을 중단시킨다. 그렇게 공연이 끝난 후 니나와 그의 관계는 멀어진다. 꼰스딴찐은 어머니의 연인인 유명 작가 뜨리고린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몰아치는 감정들 때문에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다. 2년 후 그는 소설가가 된다. 배우를 원했던 니나 역시 고향을 떠나 뜨리고린과 연인이 되지만 결국 헤어진다. 배우로 성공하지 못하는 니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꼰스딴찐과 재회하지만, 그의 사랑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그는….


 이 희곡은 앞으로 벌어진 비극을 암시하며 끝난다. 참 흥미롭게도 작가는 그 비극을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4막의 마지막을 장식한 도른의 말로 어렴풋이 그 상황을,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꼰스딴진이 자살을 시도하며 울린 권총 소리를 ‘에테르 병이 터졌다’라고 숨기며 뜨리고린에게 ‘어머니 아르까지나를 데리고 나가라’고 나직하게 이야기한다. 그 뒤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숭례문학당의 한 선생님의 표현처럼, 낭독극은 ‘책을 가장 재미있게 있는 시간’이며, 작가에게 물드는 최선이다’라는 경험이다. 혼자서 책에 쓰인 활자를 읽으며 작가가 만든 모든 허구의 세상을 이해할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왜 등장인물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사 한 구절 한 구절들을 꼼꼼하게 음미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은 <갈매기>이다. 예전에 대한민국 수험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또 다른 ‘갈매기’,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과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는 너무도 다르다. <갈매기의 꿈>의 갈매기 조나단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믿음으로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는 동물이다. 반면, 꼰스딴찐이 권총으로 맞춰 죽인 갈매기는 정상으로 도달하기 전에 쓰러진 동물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가 숱한 수험생들에게 분홍빛 희망을 안겨줬다면,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는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차갑게 알려주고 있다. 실제는 작가 체호프는 ‘죽은 갈매기’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마다 등장시킨다. <갈매기>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은 ‘갈매기’였다.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추락하고 마는 갈매기 말이다.


 낭독극을 끝마치고 난 후 계속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안톤 체호프는 자신의 허구 인물들을 극단적인 상황에 밀어 넣고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꼰스딴찐이나 뜨리고린처럼 목표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해서 ‘불행 끝, 행복 시작’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면서 인생은 만들어진다. 어떨 때는 지쳐서 ‘이제는 그만하자’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작가는 배우로 성공하지 못한 니나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일에서, 연기를 하건 글을 쓰건 마찬가지죠. 중요한 것은 꿈꿨던 빛나는 명예가 아니라 견뎌 내는 능력이에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신념을 가져야 해요. 나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고통스럽지 않아요.”(p.144, <갈매기>, 열린책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때로는 견뎌내는 힘도 필요하다. 신념을 가지고, 성공하지 않더라도 니나처럼 ‘즐겁게 환희를 느끼’고, ‘무대에 취해(..) 자신을 아름답게’ 느끼면 그것조차도 행복하지 않을까?


 등장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만났던 시간, 인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던 낭독극 <갈매기>, 올해 2022년에 뜻하지 않게 찾아온 즐거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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