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를 떠올릴 때면 2점 슛, 3점 슛보다 슬램덩크를 먼저 생각나는 시간이 있었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아도 코트 위를 뛰는 무작정 농구인들이 멋있어 보였던 시기, 바로 슬램덩크 만화 덕후 시절이었다.
2023년 1월, 대한민국 극장가에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하면서 한때 슬램덩크 만화책에 빠졌던 많은 사람을 다시금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데려가고 있다. 특히 이번 애니메이션은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과 각본을 맡아 기대가 컸다
만화 <슬램덩크>는 1990년대 <주간 소년 챔프>에서 연재되었던 일본 장편 만화이다. 농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주인공 강백호가 여러 가지 험난한 경기들을 거치면서 진정한 농구인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은 많은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솔직히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기 전에는 만화 주인공 강백호의 활약을 많이 기대했다. 숱한 어려움 앞에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행동과 말속에서 숨어있는 천재의 모습, 워낙 뜻밖의 반전 매력을 많이 선보였던 강백호였기에, 그 인물 말고는 다른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가 아니라 송태섭이다. 특히 이번 애니메이션은 만화 <슬램덩크>의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북산과 산왕의 경기를 그리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원작자는 과감하게 강백호를 빼고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왜 송태섭이었을까?’
새로운 관점으로 펼쳐지는 북산과 산왕의 경기를 보면서 내내 이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송태섭도 매력적인 인물이다. 다만 만화 <슬램덩크>에는 워낙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띌 뿐이다. 제일 좋아했던 능남고의 윤대협은 이야기 배경 상 어쩔 수 없이 빼더라도, 만화 등장인물 중에는 송태섭 외에도 다양하게 이야기를 풀 수 있는 북산 농구팀 인물들이 많았다. 두드러지는 주인공 파워 강백호, 날카로운 천재 서태웅, 우직한 노력형 채치수, 극적인 과거를 가진 정대만 말이다. 하지만 왜 감독은 그들이 아닌 송태섭이 이 클라이맥스의 주인공으로 발탁했을까? 원작자는 다른 관점에서 이 극적인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상상해 본다.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과거 만화책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송태섭의 과거가 드러난다. 그에게 천재적인 역량을 지닌 형이 있었다는 것과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가족들이 매우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168cm의 단신의 그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마음을 잡으며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나 역시도 이런 사연을 이번에 알고서야 만화책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송태섭의 숱한 방황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송태섭이 맡은 농구의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이다. 그는 주로 팀이 공격할 때 게임을 끌고 가면서 적재적소에 공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플레이메이커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경기에서 송태섭이 산왕팀의 방어에 막혀 있을 때마다 북산팀의 득점은 주춤했다. 만화책에서 강백호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런 송태섭이 답답했지만, 애니메이션에서의 그의 모습은 안타까웠다. 공을 잡아야 다른 플레이어들의 멋진 득점이 가능하다. 강백호처럼 눈에 띄는 슬램덩크도, 정대만과 같이 화려한 3점 슛도 송태섭의 어시스트가 있어야 가능했다. 강백호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했던 ‘송태섭’의 역할이, 다른 시선으로 보니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주인공도 그 가치를 알아주고 도와주는 주변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송태섭이어야만 하는 이유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대중들은 주인공이나 아주 매력이 넘치는 인물들이 아니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송태섭이 발탁된 일을 ‘보통 사람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들이 활개 치는 만화 <슬램덩크>에서 송태섭은 거의 조연으로만 인식되었다. 그는 작은 키에 걸핏하면 주변인들에게 싸움을 걸고, 매니저 한나를 좋아하는 푼수이다. 농구 재능이 있다고 표현되지만, 주변에 채치수, 서태웅, 강백호 등과 같은 천재들이 몰려있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빛나는 주인공들’만 총애했던 그 시절의 내 마음에는 썩 와닿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렇게 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거의 20년 전의 난 독특한 취향이 있었다. 모두가 알 만큼 천재로 주목받는 주인공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소수의 사람만이 눈치채는 ‘뜻밖의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이 좋았다. 주인공 강백호처럼 ‘설마 네가 그것을 할 수 있겠어?’라고 무시를 받는 사람이 ‘그 녀석은 특별해’라고 알아채는 이야기 구조를 가장 좋아했다. 진흙 속에 잠긴 진주를 캐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마음속에는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 소망이 숨어있었다. 비록 지금은 누군가를 위해 박수를 보낼지언정, 나 역시도 다른 이에게서 특별하게 대우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스스로의 가치는 스스로 챙기고 살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 하나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가치를 챙기고 알아봐 주는 일은 아주 드물다. 송태섭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평범하다 여겨졌던 사람도 관점에 따라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또다시 확인케 한다. 비록 어떤 시점에서는 눈에 돋보이지 않아도, 다른 시점에서는 충분히 빛날 수 있다.
“포기하고 나면 그 순간이 시합 종료예요”
애니메이션 속 명대사로, 내 모습을 다시 되돌아본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