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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반찬을 가장 먼저 먹기

by 하늘진주

또 한 번의 마감을 끝냈다. 이 마감을 넘기면 또 다른 마감일이 기다리고 있다. 겨울방학이라 이런저런 일을 시작하다 보니 생각보다 방학이 학기보다 더 바빠져 버렸다. 처음에는 올해 고3 큰 애의 일정과 맞물리지 않게 나름 머리를 굴렀던 일이, 긴 겨울방학에 소일거리 삼아 시작했던 일이 조금씩 늘어나 커다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시 생각하면, 매일 소화하기 벅찬 일정들은 아니었다. 작년에 이어 재미 붙이고 있는 독서 토론수업이기에 '다른 곳'에 정신만 팔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었다. 원래 책 읽기를 즐겼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데 뭐가 문제일까. 논제 만들기, 그건 '식은 죽 먹기'처럼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작년에 수료했던 심화과정과 다르게 숭례문학당의 고급과정은 선택논제만 4개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도 벽돌처럼 두꺼운 분량의 책들과 어지간한 간 큰 독자가 아니면 절대 ‘비판’이나 ‘반대의 의견’을 세울 수 없는 책들을 읽고서 말이다. 몇 주 전에 독일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 <나의 인생>을 읽고 선택논제를 낼 때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했다.

“마르셀 아저씨, 생전에도 그렇게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혹평을 하시더니, 정말 할 말이 많으셨나 봐요. 520쪽이나 되는 내용을 제 앞에 던져두셨군요.”

적당히 두리뭉실할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유논제보다 어느 한쪽을 웬만하면 골라야 할 선택논제가 어려운 것은 유독 나 자신이 선택을 어려워하는 사람인 탓은 아닐 테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앞서 우선순위를 선택하고 추진하는 일, 옛날부터 너무 어려웠다. 아니, 다시 말하면 ‘선택하기 어렵다’기 보다는 ‘자꾸만 눈에 보이는 쉬운 일’만 찾으려 힘든 일들을 회피하려고 했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책상 위 정리와 방 청소를 일삼는 학생이 바로 나였다. 왜 항상 시험기간만 되면 수학 ‘정석’의 글자보다 책상 위의 자그마한 티끌이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지.......


얼마 전에 읽었던 칼럼이 생각났다. 박진영이 쓴 <어려운 것부터 해치워야 효율 높아져/ 출처 동아사이언스, 2023.1.28>라는 제목의 글은 사람들의 ‘미루기 습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필자는 심리학자 레이철 하버트(Rachel Habbert) 등의 연구를 인용하며 ‘쉽고 재미있는 일을 먼저 하기보다 가장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이 더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즐거움은 가급적 빨리 겪고 고통은 가급적 늦추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실제로는 사람들마다 ‘미루기’의 행동방식이 빈번하게 보인다고 말한다.


평생 지녀온 불치병, ‘미루기 습관’이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참 다행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행동이 ‘독’이 될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 몇십 년이 넘도록 지녀온 나의 뚝심이 놀랍다. ‘힘든 미루기’, ‘어려운 일 피하기’, ‘생각하기 싫은 일들 까먹기’ 등등과 같은 일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마감 스트레스’와 ‘짜증’들을 유발했던가?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가 나의 세계에 남겨 둔 것은 어쩌면 ‘희망’이 아니라 ‘미루기’가 아니었을까?


필자는 마크 트웨인의 ‘하루를 시작할 때 개구리를 먹으라’는 일화를 언급한다. 본인이 생각할 때, 가장 끔찍하고 힘든 일을 먼저 겪고 나면, ‘그다음은 두렵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출산의 고통을 겪고 난 어머니가 자식의 일 앞에서는 본인이 놀랄 정도로 ‘원더우먼’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아닐까.

이제 조금 있으면 겨울방학도 끝이다. 그와 동시에 벌여놓았던 공부도 이제 중간을 달려왔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머리 쥐어뜯는 일도 언젠가는 끝이 보일 것이다. 그 이후에는 좀 편안하게 세상을, 사람들을 여유 있게 바라볼 날이 있겠지.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먹기 싫어도 하루를 시작할 때 ‘개구리를 가장 먼저 먹고’ 다른 일 하기이다. 자꾸만 다른 쉬운 책에 눈이 가도, 드라마의 내용이 궁금해도 일단은 '(하기 싫은 것부터 먼저) 빨리 끝내고 놀자'는 진리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성숙한 나에게 박수갈채를 보낼 날이 오겠지. ‘개구리 반찬’아, 나에게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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