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투박하고 묵직한 기계를 하나 내밀었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현실에서 벗어나 원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 여러분은 어떤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한참을 망설이다 기계를 결국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가고 싶은 소설 속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말이다. 어떤 곳으로 가든, 어떤 시간대로 가든 내 삶은 변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내 의지가 새롭게 다져지지 않는 한, 이런 요행만으로는 인생의 결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세상일이 녹록지 않다고 느낄수록 소설 속 판타지는 힘을 얻게 마련이다. 이 장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비루하고 불쌍한 현생을 순식간에 바꾸는 기적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판타지 소설 속에서는 너무도 쉽게 이루어진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도깨비’의 도움을 받든, 아니면 세상일에 치이는 소시민이 재벌로 탄생하는 ‘환생’, 혹은 ‘빙의’라는 힘을 빌려서든 말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엄청난 우연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큼 황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공부는 유난히 하기 싫고 성적이 도무지 오르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 가장 되고 싶었던 인물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천재성을 가진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그 당시에는 ‘우연한 계기’로 천재성을 발휘하거나, 순식간에 ‘지질한’ 인생을 바꿔버리는 등장인물이 무척 멋져 보였다. 그렇다고 매번 붉은 가면을 쓰고 활약하던 마블 영화의 ‘스파이더 맨’처럼 ‘내가 영웅이네’라고 과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그 당시의 내가 원했던 것은 ‘넌 특별해’라는 느낌, 그것뿐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 그런 인정을 누군가에게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우연이 어떤 식으로 찾아올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영화 속 고등학생인 피터 파커처럼 슈퍼 거미에게 물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 밖의 엄청난 요행을 바라기에 내 인생은 무척 평범했다. 엄청난 깨달음으로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해 ‘인생역전’을 하는 일도, 어느 순간부터 나를 ‘포기’해 버린 듯 한 부모님 앞에 당당히 빛나는 성적표를 내미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항상 허황된 꿈만 꾸던 10대,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끝났다.
그 시절에는 소설을 유난히 즐겨 읽었다. 암울한 기운이 감도는 비극보다는 주인공이 짧은 고난 속에서 행복과 사랑을 찾는 해피엔딩을 특히 좋아했다. 요정 아줌마의 도움으로 재투성이 운명에서 벗어나는 ‘신데렐라’를 읽으며 대리만족을 했고, 유부남 로체스터 앞에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에요’라고 당당히 외치는 제인 에어의 모습을 보며 두근거렸다. 첫사랑의 도움으로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신곡>의 단테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만약 미래의 어느 시점에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꼭 좋아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고통’은 짧고, ‘행복’은 길게, 그렇게 작가들이 오로지 주인공들에게 쏟는 하나뿐인 애정을 온전히 받고 싶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은 참 파란만장하다. 물론, 평범한 인생을 걸어가는 등장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한 올 한 올 마음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전혀 평범하지 않다. 휘몰아치는 사랑, 배신, 운, 슬픔, 기쁨, 수많은 감정들이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났다’라고 느꼈고, 자존감이 한없이 바닥으로 향하던 사춘기 시절, 작가들이 만들어 내는 상상 속의 세계에 갇혀서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누구보다 인생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었고, 인생에서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저 그런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언제나 빛나는 미래를 꿈꿨다. “우주의 기운으로 굳게 믿고 바란다면 꼭 이루어질 거라”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매번 소망하던 엄청난 행운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은 이뤄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같았고, 허황된 꿈을 꾸고 허투루 보내던 시간들은 조금씩 실패와 좌절의 결과로 나타났다. 애써 정신을 차려 노력했던 때에만 달콤한 열매를 보여줬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결과와 결실은 일단 행동을 하고 노력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렇게 꿈 많던 10대를 지나고, 정신없던 20대~30대를 지나 지금 40대 후반에 들어섰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토록 잡으려 했던 미래의 삶은 더 이상 오지 않는 신기루라는 것을 말이다. 항상 바꾸고 싶었던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지나간 과거를 완전히 바꾸고 새로운 미래를 산다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확률보다 더 희박하다. 현실을 충실히, 소중히 여기지 않는 한, 과거도, 미래도 바꿀 수 없다. 그토록 많은 시간 동안 난 왜 그렇게 과거와 미래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을까?
5월이 또다시 스쳐 지나간다. 6월이 오기까지 겨우 이틀의 시간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 잡는다. ‘이미 지나간 시간, 다음 달에 잘하면 되지 뭐’라고 여기는 안일함을 애써 외면한다. 이런 생각과 마음들은 자꾸만 현재를 어둡게 물들게 할 뿐이다. ‘내일’, ‘다음’이라는 시간은 없다. 지금, 현재를 충실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룰 수가 없다. 현재를 지금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충실히 살자. 내 인생이라는 소설 속, 뿌듯한 주인공이 되는 길은 바로 그것뿐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