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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Mar 13. 2023

아이들과 함께 자란다

 올해 고1인 둘째가 피곤한 얼굴로 학원에서 돌아왔다. 새로운 학교 환경에 적응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분리수거를 하러 가는 아빠를 바라보더니 책가방을 내려놓고 묵묵히 따라나선다. 한 번쯤은 ‘힘들다’라고 게으름을 피울 만도 한데, 그 녀석은 ‘툴툴’ 거리며 어리광을 피울지언정, 자기 일을 마다한 적은 없다. 우직하고, 고집이 세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철옹성’의 사나이다.


 생각해 보면, 둘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실 원래 본성이 그랬는데, 유아기에 살짝 감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그 녀석은 다치고, 넘어지고, 머리통이 깨지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직진으로 달리기만 하는 ‘불도저’였으니까 말이다. 빠릿빠릿하고 알아서 자기 할 일 잘 찾아서 하는 큰 애에 비해 둘째는 마냥 ‘불안’하고,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처럼 여겨졌다. 요즘 종종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잘 알아서 하는 둘째를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과연 아이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아이들이 성장하다 보면 ‘아이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바로 부모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참 많이 듣는다. 아이의 좋은 것부터 나쁜 것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자부하는 엄마들에게 그 말은 참 충격적이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애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요.’라는 아이의 편을 드는 말부터 ‘우리 애가 정말 그렇게 잘한다고요?’, ‘에이 설마요, 다른 애와 착각하신 것 아닌가요?’라는 아이의 장점을 부정하는 말까지, 엄마들의 마음에는 이미 ‘나름대로 필터’가 장착이 되어 있어 그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말은 이미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아이들에 향한 칭찬의 말, 좋은 말들을 곧이곧대로 반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매번 어떨 때는 ‘살짝’의 겸양이, 어떨 때는 ‘설마’라는 의구심이 섞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칭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부정의 말을 인정하기에는 ‘내 애는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알아’라는 불퉁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특히 아이의 허물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곧 ‘낙인’처럼 콕 박혀서 영원히 따라다닐 것 같아 두려웠다.


 어린 시절, 친정엄마도 남들이 말하는 아이들에 대한 칭찬들과 부정적인 말들을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 어린 시절의 내가 워낙 얌전하고 평범했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하다못해, 엄마의 영원한 자랑거리인 오빠에 대한 말을 들을 때도 그렇게 동네방네 떠벌리며 다니시지는 않았다. 묵묵히 아이들의 뒤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실 뿐, 아이들에 대한 좋은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래요?”라는 대답과 함께 입을 다무셨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매우 서운했다. ‘왜 엄마는 마음껏 표현하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에 사춘기 때는 괜히 이런저런 반항도 했었다.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 엄마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았을까? 묵묵히 인내하며 뿔난 감정들을 무시하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민감하게 기분을 살피며 대화로 푸는 것이 나았을까? 알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을 키우며 그때 당시의 기억을 되새겨 봐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엄마도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잘 몰랐기에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엄마 역시 ‘엄마는 처음이었기에’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라면 이래야 해’, ‘**은 당연히 이렇게 행동해야 해야지’라는 말들은 서로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일등 공신이다. ‘적어도’, ‘당연히’라고 말하며 상대방에게 본인들의 관점과 기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강요’를 하기보다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연습,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아이들을 낳고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 녀석들에게 여전히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아이들에게 실수할 때도 있고 마지못해 엄마의 자존심을 숙이고 사과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점점 성장하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아이들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배움의 스위치들이다. 앞으로 아이들과 어떤 모습으로 살지 모르지만, 함께 서로의 감정들을 공감하며 그렇게 열심히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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