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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11. 2023

현대인의 속물적 태도와 양심

<무진기행>(김승옥, 2005, 문학동네)

'현대인의 속물적 태도와 양심'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높은 신분을 가졌거나 ·많은 재산 등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식인들이나 상류층 사람들이 누구나 알 정도로 양심을 저버리거나 일탈을 하는 속물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사회적으로 큰 논란거리가 된다. 물론 그들 역시 욕망을 느낄 수 있고 방황을 할 수도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1964년에 발표한 김승옥의 <무진기행>(2005, 문학동네)에는 늘 안개가 자욱한 무진에서 자기 앞에 닥친 시련과 문제를 책임지기보다 회피하는 현대인의 속물적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단편소설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무진기행>은 1967년 흑백영화인 ‘안개’, 1974년 ‘황홀’, 1986년에 "무진 흐린 뒤 안개"의 제목으로 총 3차례 영화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TV 문학관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2017년에는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알쓸신잡’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1960년대 발표한 작품이 지금까지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회자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무능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물인 주인공이 무진에 머무른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살면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도망친다. 6.25 사변으로 의용군의 징발도, 국군의 징병도 모두 회피했다. 그는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어머니에게 붙들려 “무진의 골방 속에 숨었다.”(p.164) 주인공은 이 비겁한 모든 행동인 모두 “홀어미님 때문이었다”라고 탓한다. 윤희중이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마다 무진 행을 택하는 것을 보면 그런 비겁한 행동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이다. 심지어 출세의 기로에서조차 아내와 장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도망치듯 무진으로 향한다. 또 무진에서 만난 하인숙과 하룻밤을 보낸 후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친다.


  <무진기행>은 몇 가지 매력 포인트가 있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문장의 힘이다. 문장 곳곳에  표현이 아름답고 절제되어 있다. 무진의 안개를 주제로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장면, 개구리울음소리와 반짝이는 별들과 연결시켜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면 등.  소설가 신경숙은 스무 살 때 이 작품을 읽고 “지상이 아닌 다른 곳의 어떤 힘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내쏜 빛 같았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대학노트에 옮겨 써 내려가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 그렇지만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이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보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었던 것은 아니다.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과학책에서 배운 바로써가 아니라, 마치 나의 눈이 점점 정확해져 가고 있는 듯이, 나의 시력에 뚜렷하게 보여 오는 것이다.”(p.177-178)


 두 번째는 무진의 안개가 가진 신비로운 매력이다.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무진의 안개는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처럼, 이 안개는 기묘하고 오싹하다. 무진은 “초여름이 되면 반드시 몇 명씩 죽는” 도시가 되고, 그곳 사람들은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안개의 영향이다. 그곳의 안개는 사람들의 추악한 욕망과 상처, 허무감을 교묘하게 감춘다. 그렇기에 윤희중은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나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마다 무진으로 향한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속물적 태도와 양심에 대해 되물어 보는 소설이다. 윤희중은 고백한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p.175) 작가는 윤희중을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하는 것 같다. 당신은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친 적이 있는가. 당신은 반복되는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진 적이 있는가. 당신은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로운가, 작가가 던지는 이런 질문과 같은 고민을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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