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진주 Sep 05. 2023

선택의 순간, 수시원서 기간

 얼마 전부터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이면 코끝으로 서늘한 바람 냄새가 맡아진다. 지난달에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처서가 왔더니 어느새 모르긴 해도 가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시간이 언제 지났는지 가늠이 하기 어려워도 인생의 시계추는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다.


 올해의 내 시계는 고3 큰 애의 행동거지, 마음상태에 달려 있다. 얼마 전만에 해도 느긋했던 마음들이 8월이 지나 9월이 되고 보니 조바심만 밀려온다. 수능 이맘때 시간흐름이 유독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수능 원서 접수와 생기부 마감, 중요한 9월 모의고사, 그리고 수시 원서가 한꺼번에 몰려 있는 탓이다.  재수생과 N수생의 수능 시도 예측이 최대로 나온 올해, 교과내신과 학과 활동으로 가는 수시는 현역 고등학생들이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카드이다. 그래서 6장의 원서를 어디로 써야 할지 신경이 곤두서 있다. 예전 같으면 “우리 아들은 정시에 올인해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테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오만이다.


 며칠 전 큰 애의 담임 선생님과 수시 원서 상담을 했다. 선생님은 큰 애가  6장을 쓸 수 있는 원서 중 ‘학교장 추천’으로 쓸 수 있는 원서 몇 장을 모두 하향지원해서 놀랬다고 했다. 원하는 학교와 학과를 수시로 접수하기에는 조금 불안한 탓이다. 아들은 이제 와서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진 탓일까?


 사실, 수시 원서를 쓰는 문제에 대해서 아들과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큰 애는 수시로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로 ‘안전’하게 쓰기에는 부족한 자신의 현 성적에 한탄했고, 비슷한 성적의 동급생이 자기보다 유리한 조건인 ‘농어촌 전형’으로 자기가 원하는 학교와 학과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절망했다.


 참 재미있게도, 현역 고등학생들은 6장의 수시원서가 있어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무조건 쓸 수 없다.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대학을 지원할지라도 학과는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 이른바 학교 입장에서도 가장 ‘효율’적이고 ‘가능성’ 있는 확률로 학생들의 수시원서를 배분하는 셈이다. 특히 학교장 추천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아들은 일찌감치, 반에 본인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 혹은 유리한 전형의 친구가 있어 수시로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로 ‘학교장 추천을 받을 수 없다’며 씁쓸해했다. 학교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 아들’의 상황이 되고 보니 참 서글프기만 하다.


 한때 각 중학교에서 전교 1~2등만 했던 아이들만 모아둔 학교에서 3년 동안 잘 견뎌온 아들에게 물었다.

  "혹시 친구 중에 이 학교에 와서 후회하는 아이들은 없니?"

  "많죠. 예전에는 자기보다 못했던 아이들이 일반고로 지원해서 지금 더 좋은 대학을 지원하는 걸 보면 후회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넌 어떠니?’

  하지만, 차마 큰 애에게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3년 전의 선택도, 지금의 선택도 오로지 그 녀석의 몫이니까 말이다.


  얼마 전에 아들은 다시 마음을 다 잡겠다면 매주 집으로 오는 일정이 아니라  한 달 두 번만 집에 오는 스케줄을 선택했다. 주말에 집에 와서 낭비하는 시간마저 줄여서 공부하겠다고 했다. 가뜩이나 먹을 것에 예민하고 잠도 많고 게임을 좋아하는 아들이 그 빡빡한 스케줄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


 그런 걱정을 내비치니 아들은 담임 선생님의 학생이었던 예전 졸업생 선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학교에서 전무후무한 '전설의 내신 1등급'(워낙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 1개만 틀려도 바로 2등급으로 내려가는 일이 다반사다) 선배는 3년 내내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하고 밤늦게 잠들었다고 했다. 무조건 그 선배는 본인이 꿈꾸던 S대 의대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 모두가 믿었다.


 "그래서, 그 선배는 S대 의대를 갔니?"

 "아니요, 수능 날 아파서 결국 K대 갔대요. “

 어머나, 안타까워서 한숨을 쉬니, 아들이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무 아깝다’며 주변에서 반수를 권했지만, 그 선배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공부해 더 이상 미련이 없다’며 그대로  K대 진학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Y대‘ 로스쿨 합격증 사진을 선생님께 보냈다는 후문이다.


 9월은 특히나 고3들에게도 고3 엄마들에게도 흔들림과 부침이 많은 시기이다. 3년 동안 노력한 결과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은‘ 자괴감을 느끼는 시간이고, 다른 친구들의 성적으로 비참함에 빠지는 시기이다. 이대로 편안하게 ’하향지원‘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거센 풍랑 속에 노의 흔들림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지금 ‘앞 뒤’ 흔들리는 이 시간도 더 높은 위치로 향한 도약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가 아닐까? 아들아, 너무 실망하지 말고 조금만 힘을 내렴. 이제 고지가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매거진의 이전글 힘내세요, 고3 담임 선생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