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상처와 화해하는 법’, <눈부신 안부>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순정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문구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그림체와 방대한 서사로 유명했던 신일숙의 만화, 몇십 년이 지난 이후에도 유독 이 문장만은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예전의 우리 집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무섭고 강압적이었다. 예민한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주변에서 받은 상처를 속으로만 담아냈기에, 우연히 만화책 속에서 읽었던 이 문구는 눈부신 구원이요, 희망의 메시지였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이런 일은 금방 지나가리라’라고 믿었다. 올해 나온 따끈따끈한 신작,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문학동네, 2023)는 진실한 용기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작품이다.
소설은 크게 주인공 해미의 어린 시절과 성인 무렵, 이 2가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해미는 어린 시절 가스 폭발사고로 사랑하는 언니를 잃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슬픔을 잊기 위해 독일로 떠난다. 그녀는 그곳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파독 간호사들과 가족들과 인연을 맺으며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노력한다.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 사연을 듣고 친구들과 이모의 사연들을 파헤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경제상황의 악화로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옛 인연들은 끊긴다. 20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해미는 우연히 대학시절 마음에 두었던 친구 우재와 다시 만난다. 그와 이런저런 추억들을 나누며 그동안 묻어 두었던 독일에서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본인의 삶을 다시 반추하게 된 해미, 그녀는 과거의 인연들과 다시 연락하며 거짓말로 포장했던 그 일의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의 비극으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여성이 조금씩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았다. 주인공 해미가 인간관계의 상처를 선택하는 방법은 거짓말이다. 언니의 죽음에 마음의 빚이 있는 그녀는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주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도 두렵다. 주인공은 독일에 있으면서 “엄마에게 무척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해미는 엄마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아빠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늘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본인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무엇보다 언니의 죽음으로 잠시의 헤어짐을 견딜 수 없어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미는 본인이 하는 “거짓말이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것들이 괜찮다고 생각했”(p.33)다.
그녀의 거짓말은 독일에 있는 친구 한수에게까지 이어진다. 해미는 한수에게서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에서 수소문하던 중이었다. 결국 그녀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지 못하고 한수에게 거짓말을 한다.
“응, 교회에서 찾았어.”
“어떻게 찾았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 사람 어디에 살아? 엄마 이야기 했어? 지금 당장 엄마를 보러 올 수 있대?”
한수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수의 이토록 밝은 목소리를 들은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응, 당연히 선자 이모를 기억하고 아주 그리워하고 있었어. 선자 이모가 아프다는 소식에 무척 슬프다며 울먹였어.”
“엄마를 보러 와주겠대?”
나는 계획하지도 않은 거짓말이 또다시 내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거짓말은 멈춰지지 않았다.
“아니,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보러 갈 수는 없대. 이젠 결혼해서 가정도 있고, 무엇보다 직장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p.231)
급기야 해미는 죽어가는 선자이모에게 첫사랑인양 거짓으로 편지를 보낸다. 이후 그녀는 죄책감에 선자 이모의 일기장, 한수와의 편지 등 독일에서의 모든 기억과 인연들을 박스에 봉인한 채 과거의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어른이 된 해미는 마음에 두었던 대학 동창 우재와 만나며 독일에서의 일들을 다시 떠올린다. 그녀는 봉인한 종이 박스를 열어 다시 한번 선자 이모의 일기를 들춰보며 ‘첫사랑 찾기’에 나선다. 너무 어렸고 비겁했던 과거의 모습과 다시 조우하기 위해서 말이다. 거짓말로 상처 입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한 용기뿐이다.
소설 구석구석에는 삶에 관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선자이모의 첫사랑을 다시 찾기로 마음먹은 해미는 일기장을 다시 읽으며 예전에는 무심코 넘겼던 루이제 린제가 쓴 <생의 한가운데>의 구절이 열세 권이 넘는 일기장 첫 페이지마다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p.196)
그러면서 해미는 생각한다. “선자 이모는 어떤 마음으로 이 문장을 일기장마다 적은 걸까? 그녀는 무엇을 꿈꾸며 독일로 떠났고,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을까?”(p.160)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책 속에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통해 상상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해미 이모의 언어로 이렇게 전한다.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p.227)
<눈부신 안부>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방심할 수 없다. 군데군데 재미있는 요소를 숨겨두었는데,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소설의 첫 부분이다. 작품의 첫 문장은 “야자수. 나는 야자수를 떠올리고 있다.”로 시작한다. 놀랍게도 주인공 해미가 떠올리고 있는 야자수는 하와이나 발리의 나무가 아니라, 제주도의 가로수이다. 무심코 넘기는 소설의 첫 문장은 사실 스토리의 중심축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문구이다. 이 문장은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의 우재와 해미의 대화에서 다시 등장한다. “제주는 정말 한국 같지가 않아. 야자수가 이렇게 많다니. 동남아도 하와이도 아닌데 신기해.”라는 그녀의 질문에 우재는 “원래 제주도에는 야자수가 한 그루도 없었지”만, “아름다운 남국의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 야자수를 정책적으로 수입해 심었다”(p.307)라고 답변한다. 힘들게 살아남은 야자수들은 제주의 일부가 되었고 힘들게 타국에서 버텼던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의 일부가 되었다.
한 마디로,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는 참 아름다운 소설이다. 한 구절 한 구절 자꾸만 생각하게 만드는 깊은 문체부터 그 속에 묘사된 반짝이는 등장인물들의 삶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그저 소설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다 읽고 나니 주변을 향한 눈부신 안부가 가득 생각난다.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책 속의 이야기를 따라가니 어느새 마음에 힘이 생긴다. 묻혀 두었던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는 책, <눈부신 안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