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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Sep 23. 2023

'사랑의 주인공이 아닌 인생의 주인공'

만화 <캔디 캔디> (서평)

 ‘사랑의 주인공이 아닌 인생의 주인공‘ 만화 <캔디 캔디>


한때 일요일 아침이면 대한민국 소녀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만화영화계의 아이돌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캔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만화영화 주제가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TV앞에 홀린 듯이 앉았다.


 한마디로 만화영화 <들장미 소녀 캔디>는 모든 소녀들의 로망을 모아둔 꿈의 만화였다. 현실에서는 보기 드문 ‘안소니, 아치, 스테아, 테리우스, 앨버트’ 같은 잘생기고 멋진 남자들이 한 소녀를 둘러싸며 공주님처럼 대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황홀했다. 대한민국의 어떤 소년이 “넌 웃는 얼굴이 더 잘 어울려”라는 ‘간질간질한 말’을 소녀에게 할 수 있을까? Never! 그냥 놀리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이렇게 멋진 소년들에게 사랑받는 캔디가 어떤 이와 이어질지는 최대의 관심였다. 결국 캔디는 많은 소녀들이 그토록 응원했던 시대의 반항아 테리우스와 이어지지 못하고 가슴 아프게 헤어졌다. 나를 비롯한 많은 소녀들의 눈물, 콧물들을 쏙 빼놓은 채 말이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아쉬움만을 남긴 채 지나 가는 세월 속에 점점 희미해져 갔다.


 문득 캔디의 사랑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 큰 맘을 먹고 6권의 컬러애장판 <캔디 캔디>(이가라시 유미코, 도서출판, 하이북스, 2005)를 구매했다. 다시 살펴본 <캔디 캔디>는 여전히 그림체가 예뻤고,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아름다웠고 싱그러웠다. 1권, 2권, 그렇게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만화책들을 훑어보고 있자니, 어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캔디 캔디>의 또 다른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지금까지 이 만화를 캔디와 테리우스와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이 만화는 단순히 사랑을 주제로 한 순정만화가 아니라 운명의 풍파 속에서 한 소녀가 긍정의 힘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였다.


 <캔디 캔디>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밝고 긍정적인 고아 소녀 캔디가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성장해 가는 장편 만화이다. 고아원 <포니의 집>에 사는 캔디는 단짝 애니가 부잣집 양녀로 간 후 <더 이상 편지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받고 슬픔에 잠긴다. 그녀는 포니의 동산에 올라가 엉엉 울다가 스코틀랜드 의상에 백파이프를 맨 낯선 소년을 만난다. 그는 "꼬마 아가씨는 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예뻐"라는 말과 함께 캔디를 달래고는 사라진다. 캔디는 이 소년에게 <동산 위의 왕자님>이는 별명을 붙이고 밝게 살기로 마음먹는다. 12살이 되던 해 그녀는 레이크우드에 있는 라건 가에 이라이저의 말동무로 들어가고 동산 위의 왕자님과 닮은 안소니를 비롯한 아치, 스테아를 만난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안소니가 낙마 사고로 죽자 캔디는 윌리엄 큰 할아버지의 권유로 런던에 있는 성바오르 학원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캔디는 테리우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대부분의 소녀 팬들은 <캔디 캔디>를 캔디의 사랑이야기로만 기억한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멋진 소년들과의 인연에 홀린 탓이다. 멋진 동산 위의 왕자님과의 첫 만남, 그 왕자님과 닮은 안소니, 그리고 안소니의 뒷모습을 닮은 테리우스, 캔디의 순순하고 말랑말랑한 감정 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 가득 분홍색 설렘만을 느끼게 된다. 많은 소녀 팬들은 울고 웃으며 캔디의 사랑을 응원했다. 캔디의 첫사랑 안소니가 운명의 장난처럼 낙마 사고로 죽었을 때 소녀 팬들은 눈물을 흘렀고, 테리우스와 캔디의 사랑이 어긋났을 때 엄청나게 분노했다. 불운한 사고를 빌미로 기어이 테리우스를 쟁취한 스잔나를 미워했다.


 하지만 다시 살펴본 만화책 속의 캔디는 어긋난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기보다는 불운한 환경 속에서도 용감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할 줄 아는 당당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강인한 면모는 테리우스와 헤어진 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캔디는 이라이저의 음모로 퇴학 위기에 처하지만, 테리우스의 희생으로 일주일 근신만 받고 풀려난다. 이 순간 그녀는 순순히 본인의 상황에 순응하기보다는 과감히 학원을 뛰쳐나온다. “테리도, 알버트 씨도 모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어. 테리, 나도 내 길을 찾고 싶어!”(p.220, 3권)라면서 말이다. 이후 캔디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병원에서 간호 견습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p.131, 4권)를 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병원 안에서도 종군 간호사가 파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캔디를 포함한 5명의 간호사는 외과와 내과를 전문으로 하는 시카고 대학병원으로 파견을 간다.


 전쟁은 간호사가 된 캔디의 눈으로 참혹하게 그려진다. 캔디와 번번이 어긋나는 테리우스와의 만남도 안타깝지만, 전쟁으로 변하는 주변 상황들은 애절하기만 하다. 특히 캔디를 지켜주던 삼총사(안소니, 아치, 스테아) 중 한 명인 스테아는 연인 패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 공군병으로 자원을 한다. ‘왜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데로 자원을 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던 미국의 하늘은 평화로웠어. 그런데 같은 하늘인데도 저쪽에서는 전쟁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싫었어. 가만히 있는 내 자신이 안타까웠어.”(p.85, 6권)



 결국 스테아는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천애고아였던 캔디도, 부유한 미국 상류층인 스테아도 도망칠 수 없는 전쟁의 비극이었다.


 그런 면에서 <캔디 캔디>는 자칫 안타까운 전쟁의 현실만을 알리는 재미없는 순정만화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이가라시 유미코는 캔디와 테리우스와의 아름다운 사랑을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과 유럽의 상황과 사람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많은 소녀 팬들이 지금까지도 인생 만화로 <캔디 캔디>를 꼽은 이유는 캔디의 말랑말랑한 연애와 씩씩한 소녀의 성장담도 한몫했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그 속에서도 젊은 남녀의 사랑이 있었고, 평화를 기원하는 젊은이들의 소망이 있었고, 인생을 밝게 살려는 한 소녀의 꿈이 있었다.


 만화 영화 주제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에는 지나온 캔디의 모든 시간들이 숨어있다. 이제 캔디를 그저 어긋난 사랑의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한 강인한 여성으로 다시 불러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과 미국의 상황을 다시 살펴보고 싶은 사람들, 씩씩하게 운명을 개척하는 강인한 여성을 보고 싶은 사람들, 옛 순정만화의 추억에 잠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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