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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들에 대한 고마움

by 하늘진주

폭풍 같은 고3 수시원서 접수 기간이 끝나고 며칠 뒤, 기숙사 고등학교에 있는 큰 애에게서 톡 하나를 받았다. 수시원서 접수가 끝났으니 얼른 신청 사이트에서 남은 금액들을 환불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런 아들의 문자에 “알았다”라고 말하고 무심히 넘겼다. 11월 수능 이후에 있을 정시 접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환불이 급하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다음 날, 아들은 좀 더 다급한 어조로 환불을 받으라는 문자를 보냈고, 그 유난스러움에 왜 그런지를 물었다. 아들은 지금 인강 교재들이 많이 필요한데, 그 금액 때문에 혹시 생활비에 부담이 될까봐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씩 웃으며, 괜찮다며 바로 보내주었다. 그러자 큰애는 아주 감격한 이모티콘과 함께 "고맙습니다“라는 답변을 했다.


큰 애는 작년 고2 겨울 방학부터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오로지 인강을 들으며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 결정이 바로 급격한 성적하락으로 이어질까 무척 두려웠다. 하지만, 아들은 몇 차례의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은 후 생각보다 잘 적응 중이다. 처음에는 왜 아들이 학원을 다니며 ‘쉽고 편하게’ 공부하지 않고 갑자기 ‘어렵고 힘든’ 독학의 길을 가려는 지 궁금했다. 아들은 “그냥 시간이 아까워서요”라고 대답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그동안 큰애의 말과 행동들을 관찰한 결과, 그 녀석의 “아깝다”라는 말속에 “학원과 집을 오가는 ‘시간’이 아깝고 (부모님께) 많은 ‘돈’을 요구하기가 아깝다”라는 말이 숨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을 때도 필요한 교재비를 청구할 때마다 미안해했고,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부모로서 당연히 아이의 교육비를 지원하고 아이의 노력을 격려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들이 그 점을 콕 집어 감사하다고 표현해 주니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적의 노래 <당연한 것들>은 코로나 19가 한창인 2020년 4월에 나온 희망송이다. 그는 노랫말 속에서 이렇게 흥얼거린다.


그때는 알지 못했죠. 우리가 무얼 누리는지

거릴 걷고 친굴 만나고

손을 잡고 껴안아주던 것 (중략)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중략)

서로 믿고 함께 나누고

마주 보며 같이 노래를 하던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중략)

아무 준비가 오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왔고 우리의 모든 것들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전에 평범하게 했던 사회활동과 개인활동들을 할 수 없었다. 학교가 멈추었고 모임인원이 제한되었다. 함께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낯선 사람들이 소소한 잔기침만 해도 경계의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차갑고 날 선 3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이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또다시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조금씩 잊어버리고 있다.


세상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부모가 아이들 밥을 챙기는 것’,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 ‘추석 때 온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 ‘주문한 택배 용품을 받는 것’ 등등,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당연한 일들이다. 그래서 그런 행동들에 대해 딱히 어떤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그런 상대방의 무심함이 서운할 때가 있다. 애써 시간 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사소한 배려와 양보들을 권리처럼 받아들일 때, 부모로서, 혹은 자식으로서 행하는 보살핌들을 너무도 당연한 의무처럼 받아들일 때, 가끔은 억울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밀려온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챙기는 것이 맞다‘. ‘자식은 ‘무조건’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어른이 이야기하면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앞에서는 '우선’ 듣는 시늉이라도 해라.’


당연한 것을 주고받는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 바쁘게 자기 시간을 내어 챙겨주는 사람들에게 대한 ‘미안함’, 사소한 일에도 감사를 표하는 ‘예의’가 없으면 사람들의 맘은 쉽게 상처를 입는다.


세상에는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은 없다. 모든 것들은 사람들의 관심, 노력, 시간들이 이루어져서 만들어진다. 다정한 마음의 싹을 틔우는 말들은 표현할 때 화려한 꽃을 피운다.

“고맙다”

“수고한다.”

“애쓰고 있다”

잘하고 있다”

힘내라”


그런 이들의 노고를 알아채고 표현할 때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낀다. 소소한 일에도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 맛없는 반찬을 먹을 때도 무조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라고 설레발치는 남편, 매일 푸석한 얼굴인데도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 “예쁘다”라고 말해주는 친구들, 그렇게 표현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온 마음이 따뜻하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고향에 모여 나눌 이야기들이 많을 추석, 올해 한가위는 당연한 것들을 특별하게 여기는 행복한 명절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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