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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곱게 가꾼 문장들이 비상한다

by 하늘진주

‘퇴고’(推敲)는 중국 당나라 중기 ‘가도’라는 시인이 시 한 편을 짓다가 마지막 구절을 ‘밀 퇴’로 할까 아니면 ‘두드릴 고’를 고민하다 나온 말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과 주제 못지않게 한 문장 한 단어들에 무척 공을 들인다. 특히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매듭을 지을지는 영원히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다. ‘원래 초고는 원래 버리기 위해 쓰는 글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작품의 초고는 3번, 4번 이상의 퇴고를 거쳐야만 비로소 읽을 만한 글로 완성된다. 물론, 작가들의 성향에 따라서 일필휘지로 단숨에 쓰는 글쓰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수십 번의 퇴고를 거쳐서 나오는 글쓰기가 더 맛깔스럽다.


실력 있는 연극배우, 가수들은 내 쉬는 숨소리 하나마저도 관객들을 몰입시킬 수 있다고 한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훌륭한 글쟁이’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쉼표 하나마저도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물론, 취향에 따라 몇몇 독자들은 문장의 세세한 표현보다는 전체적인 구성과 주제의식을 더 선호할 수 있다. 혹은 논리적인 글을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뛰어난 내공이 있는 작가의 글쓰기는 한 문장만 읽어도 전율이 흐른다. 특히 오랜 기간 문장을 다듬고 글을 쓴 사람의 글은 비록 그 작품이 본인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몇 년 동안 읽었던 책들 중에 좋았던 문장들을 생각해 본다. 그중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많이 읽는 작가들의 작품도 있었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도 있었다. 유독 좋아하는 작품들은 자기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끌고 가는 글보다 은유가 가득한 시적인 문장들이 가득한 책들이었다. 그 작품들 속에 있는 자연을 빗대어 인생을 노래하는 문장들이 좋았고,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린 글들이 좋았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여러 번 곱씹어 보는 문장들이 있는 책들도 항상 책꽂이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책들 중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문장들이 가득한 작품은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다.


이 작품은 문명의 수혜를 받지 못한 채 습지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이, 카야 클라크의 성장기로, 추리형식으로 살인 사건을 끌어가는 소설이다. 이 책은 치밀한 복선과 스토리 전개 못지않게 섬세한 자연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다. 델리아 오언스는 원래 논픽션 작품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로, 자연 에세이로 여러 번 상을 받은 글쟁이다. 그녀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장편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썼고, 작품이 나오자마자 미국 서점가를 휩쓸었다.


물론, 소설의 내용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했지만,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로 꼽는 이유는 바로 책 속의 한 문장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수천 장의 노란 시카모어 낙엽이 생명줄을 놓치고 온 하늘에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시간을 타고 정처 없이 헤맨다. 잎사귀가 날아오를 단 한 번의 기회다.(p.155)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이 문장을 처음 접하고 한참을 곱씹어 생각했다. 떨어지는 낙엽의 비상은 어떤 의미일까? 왜 작가는 낙엽의 떨어짐을 ’추락‘이 아니라 ’비상‘으로 표현했을까? ‘비상’과 주인공 카야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당나라 시인 ‘가도’가 ‘퇴고’의 어구를 고민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당시의 나에게 가을 낙엽의 ‘추락’과 ‘비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참을 혼자서 이 문장을 되씹고 고민하다 같이 책을 읽은 친구들과 논쟁까지 벌였다. 결국 그 의미를 각자 해석하기로 마무리 지었지만 말이다. 얼마나 많이 자연을 보며 사색을 해야 이런 문장이 나오는 걸까?


요즘도 자연을 바라보며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 좋다. 여러 번 곱씹어 고민하게 하는 문장도 사랑하고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작가의 깊은 고민이 들어간 어구들도 즐긴다. 백 마디로 의미 없이 주절대는 문장들보다 여러 번 지우고 쓰며 힘들게 함축한 글이 좋다. 쉽게 쓰인 듯 보이지만, 많은 고민과 생각이 듬뿍 담긴 문장들이 아름답다. 많은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허세가 가득한 글이 아니라 작가의 우직한 지조와 신념이 느껴지는 순박한 문장들을 사랑한다. 그런 단어와 어구들을 기쁘게 수집하고 저장하며 쓰고 싶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좋아하는 글들도 우수수 생각의 대지로 떨어지면 좋겠다. 마음으로 곱게 가꾼 문장들이 추락이 아니라 다시 비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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