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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그리고 그 이면...

by 하늘진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이키다 무심코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머그컵 속을 들여다본다. 투명하면서도 연한 갈색의 수색, 손의 흔들림대로 움직이는 모양이 꼭 가을 낙엽을 닮았다.


짜증스럽게 덥던 여름이 가고 차가운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기 시작하니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계절이다. 얼음을 가득 채워 마셨던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눈앞에 있는 날카로운 여름의 열기를 식혔다면, 연하게 타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은 온몸으로 퍼지는 온기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게 한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과 공허, 그리고 쓸쓸함이 커피 향과 더불어 머릿속을 휘몰아친다. 자꾸만 쓸데없는 공상과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 커피의 한 모금이 생각의 윤활유가 되어 끊임없이 그 이면의 세계를 향해 날아간다. 내 손에 들린 한 잔의 아메리카노, 이 녀석은 내 입 안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가을날, 시인 장선주은 ‘대추 한 알’을 살피며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라고 속삭인다. 그는 초록빛 대추 한 알이 저렇게 붉은색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태풍’, ‘천둥’ 그리고 눈물 어린 낮과 밤의 시간을 보냈을지 통찰한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시인의 진한 가을날 감성을 따라가다 저도 모르게 딱딱했던 생각의 감각이 물렁해진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던 커피의 지난 시간이 궁금한 이유는 단지 가을이 다가와서일까?, 아니면 추운 날씨, 따뜻한 온기를 더하는 아메리카노 때문일까? 시인이 던진 <대추 한 알>의 사색이 내 손 안의 커피 잔 속으로 풍덩 파고들어 궁금증을 더한다.


졸음을 깨우기 위해, 그리고 일의 능률을 위해 마시기 시작했다는 검은 음료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7세기 염소 목동이 우연히 발견한 이 까만 열매가 이집트로, 예멘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 참 긴 시간이 걸렸다. 돈이 될 만한 물품은 항상 경쟁과 물욕, 때로는 피와 눈물과 숱한 전쟁을 부르기 마련이다. 음료의 황금이라고 불리던 커피콩 재배지를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싸움은 이미 끝났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씁쓸하면서 가을의 맛을 닮은 커피는 참 아픈 역사를 지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대인의 커피 한 잔은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기본 옵션이다.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친구들과 수다 떨며 마시는 커피 한 잔, 심심할 때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 모임을 할 때나 사람들을 만날 때, 일을 시작할 때도 현대인의 삶은 이 커피 한 잔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옛 선조들을 홀렸던 커피의 중독성은 오늘날 후손들까지 그 검은 매혹 속으로 쉴 새 없이 끌어당기고 있다. 이는 커피의 축복인가? 아니면 한 맺힌 커피의 저주일까? 그 숱한 한 잔의 음료에는 커피콩의 자유와 꿈과 희망은 들어있지 않다.


식어가는 커피 한잔에 다시 한번 뜨거운 물을 부으며 생각한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갈려 형체도 보이지 않는 커피, 그네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지구의 생명체로 태어나 그네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을 것이다. 그들이 원한 꿈은 인간들의 촉망과 유명세 속에서 잊히지 않는 존재인지, 아니면 망각 속에 사라지는 것인지 헷갈린다.


금방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은 가을을 닮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는 커피콩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초록의 열매로 태어나 뜨거운 불에 태워지고 날카로운 칼날에 갈리고 뜨거운 물을 적시는 인고의 시간 말이다. 파릇파릇한 봄이 지나고 못 견디는 여름이 지나야 맞이할 수 있는 가을처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려면 꼭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 시절의 무모한 도전보다는 주춤거리며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많은 나이, 내 삶과 더불어 문득 커피의 삶을 어떻게 규정할까 사색에 잠긴다. 커피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과 강한 시련으로 영원히 잊히지 않는, 누구나 사랑하는 화려한 명성을 지녔다. 결국 그네들의 삶은 성공일까? 아니면 비극일까? 유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씁쓸한 맛, 차라리 그들은 無名의 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오늘따라 커피 향이 진하게 입안에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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