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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의미를 묻는 영화 <1947 보스톤>

by 하늘진주

‘조국의 의미’를 묻는 영화, <1947 보스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타국에 걸린 태극기만 봐도 마음이 뭉클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동포만 만나도 그렇게 반갑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만 들어오면 그런 감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다. 눈앞에 닿친 수많은 스트레스, 민생을 돌보지 않고 이권다툼만 하는 듯한 정당들, 아무리 용을 써도 올라갈 수 없는 계급의 사다리들, 그런 골칫거리들이 도사리는 한국사회를 느끼면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소설가 장강명처럼 ‘한국이 싫어서’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더라도, ‘공평’하고 ‘복지’가 잘되어 있는 북유럽 어딘가로 도망가 살고 싶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상 한국 땅을 떠나면 또다시 고국이 그립다. 싫증 나게 먹던 김치, 김밥, 된장찌개가 생각나고, 지겨웠던 모든 일들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조국’은 국민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DNA이다. 지겹고 밉고 짜증이 나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마음의 피와 살이 되는 존재이다. 이처럼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조국’은 복합적인 의미이다. 미워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도망치고 싶어도 의지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당당한 투정도 우리나라의 위상이 옛날과는 천지개벽정도로 다르기에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선조들이 보면 기함하며 호통부터 쳤을 오늘날 후손들의 모습이다. 시간을 공유하다 보면 서로를 향한 이해는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2023년 9월, 강제규 감독은 후손들과 선조들을 연결시키는 영화 한 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조국의 이름을 신성불가침의 엄숙한 종교처럼 가슴에 새기고 다녔던 마라토너 선조들의 이야기이다.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은 마라토너 서윤복의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을 소재로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은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고 2년 뒤, 미군정 시대로, 잘 사는 사람들보다는 못살고 헐벗은 국민들이 많았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이 당시의 대한민국은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 외국에서 당당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난민국으로 취급을 받았다. ‘뜀박질’보다는 ‘기술’이 중요했고, ‘꿈’보다는 ‘돈과 먹을 것’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 험악한 상황에서 나라의 이름을 다시 한번 알리고 싶었던 국가의 영웅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그리고 천재 마라토너 서윤복은 갖은 고생을 하며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이 영화에서 손기정 선수는 나라 잃은 슬픔과 마라톤 참가의 의미를 피가 끓는 마음으로 토로한다.

"나라가 독립을 했으면 당연히 우리 기록도 독립이 되어야지!"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지만, 시상대 위에서 화분으로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다. 해방을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조선의 선수였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다는 이유로 그의 세계기록은 일본에 귀속된다. 마라토너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이 다시 한번 조국의 이름을 알릴 기회는 런던 올림픽 출전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출전권은 국제대회를 참여한 선수들만이 딸 수 있었다. 이미 손기정 선수의 기록은 일본의 소유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한번 국제대회 참여권을 따기 위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어떤 관객들은 감동과 눈물의 영화라고 평가하는 가 하면, 또 다른 관객은 신파와 억지 눈물 연출로 영화 관람 내내 불편했다고 말한다. ‘신파와 감동’, 이 영화를 볼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아슬아슬한 평가의 분기점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관객들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와 평가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소재가 그 시대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보스톤 마라톤 경기에서의 서윤복 선수의 불굴의 뜀박질 장면은 왠지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지게 하는 마법이 있다. 그 감동이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선수가 지닌 ‘죽어도 꺾이지 않는 긍지’때문인지, 아니면 주인공 임시완 배우가 주는 명품 연기의 힘인지는 알 수 없다.


<1947 보스톤>은 한 마디로 ‘조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억지로 애국심을 주입시키고 국가의 의미를 강제로 알려주지 않아도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뜨거운 울분과 감정들이 끓어오른다. 대한민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외국인들 앞에서 불쌍한 난민 취급과 강제로 성조기를 달고 뛰어야 하는 선수들의 입장이 되면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힘이 없어서’ 나라를 뺏겼고, ‘나라가 없어서’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정부를 제 때 세우지 못해서’ 런던 올림픽에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던 선수들을 보면 자연스레 ‘나의 조국’을 되돌아보게 된다. 때로는 밉지만, 때로는 민심을 잘 돌보지 못해서 화가 나지만, 그래도 국가가 있기에, 조국이 있기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다. 힘없는 조국 밑에서 꺾이지 않는 잡초 정신으로 살아갔던 선조들을 그리며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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