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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Sep 28. 2023

앉은 자리는 바뀔 수 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왔어요?"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분기' 수업이 아니라 짧게 진행되는 몇 시간짜리 '단타' 수업을 들어가면 아이들에게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른바 학생들과 외부강사 사이의 기싸움이라고나 할까? 모든 수업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단타 수업들은 정규 수업이 아니라 '시간 땜빵'용 수업이 많다 보니, 아이들은 외부강사 수업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학교수업 시간대 역시 학생들이 집중을 못하는 ‘학기 말’이나 ‘시험 직후’, 혹은 점심을 먹고 나서 제일 집중이 안 되는 ‘5-6교시'에 진행되다 보니, 학습 분위기도 그렇게 좋지 않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들은 정말 하기 싫은 표정을 짓거나 이미 얼굴에는 졸음이 가득하다. 겨우 학생들을 어르고 달래서 수업을 하면, 아이들은 잠시 수업내용을 따라 하는 시늉을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꼭 이런 성격의 질문을 던진다. "넌 어디서 온 누구냐?", "네가 진행하는 수업이 우리에게 필요한 수업이냐?", 사실 학생들의 이런 질문은 대답이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은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하냐’는 짜증 섞인 투정이 가득 숨어있다.


  막 강사 일을 시작할 무렵, 이런 질문들이 무척 스트레스였다. 내가 속해 있는 단체는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대면 모두가 알만한 유명 강사조직도 아니었고, 특정한 분야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내실 있는 강사단체였기에, '이야기한들 알까?' 라는 회의적인 마음이 더 강했다. 이른바 '삼성, 현대, LG' 등과 같은 대기업에 일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의 물음 없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유명하지 않은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에 다닌다고 하면 꼭 많은 질문 세례를 퍼붓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초반에는 우리 강사 조직의 이름부터 하는 일의 성격, 사무실 위치까지 아이들이 묻는 질문들에 성실히 대답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설명이 학생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간단히 언급만 하고 바로 수업으로 넘어간다. 어차피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 일 테니 말이다.


 한국사회는 유명한 ‘간판’과 ‘브랜드’ 없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가 참 빡빡한 곳이다. 비단 대학 간판뿐만 아니라 학원 명판, 동네 이름까지도 이름이 중요하다. 잘 몰랐던 사람이라도 SKY 대학을 다닌다고 하면 사람의 이미지가 다시 보이고, 아이들 역시 대치동 학원을 간다고 하면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로 유명한 이름이 주는 후광이자 우리들의 편견이다. 그뿐만 아니라 무의식 중에 차별의 말도 쉽게 내뱉는다. 학생들도, 엄마들도 '동네 학원과 대치동 학원은 달라'라는 말을 쉽게 꺼내고, 가르치는 선생님들 역시 '동네 아이들과 대치동 아이들은 수준이 다르다'라고 일상적으로 말한다. 결국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만 남는 말인 줄 알면서도 ‘쉽게’ 비교하고 ‘쉽게’ 그 판단들을 받아들인다. 그것도 무의식 중에 말이다.


 김지혜 작가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최규석의 웹툰 <송곳>을 인용하며 ‘어떻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한다. 그녀는 본인들이 서 있는 자리, 위치, 상황에서는 차별이 보이지 않지만, 다른 위치, 다른 상황에서는 세상의 풍경이 달리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규석 웹툰 <송곳>에서는 지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꼬집어 말한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p.38) <선량한 차별주의자>


 '누구나 앉은 자리가 바뀔 수 있다'고들 한다. 지금 누군가를 다른 이와 비교하고 품평하는 이 자리가 어느 순간에 반대로 뒤바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에게 '어디 조직에서 왔냐'는 말에 상처를 받은 내가 어느 순간 다른 곳, 비슷한 자리에 앉아서 워크숍을 진행하는 외부강사에게 '어디에서 주로 강의했냐?'며 미심쩍은 시선을 던질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앉은 자리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씩 나만의 아집에 빠질 때가 있다. ‘나만 힘들고’, ‘내 생각이 가장 옳고’, ‘내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들 말이다. 지나온 시간과 함께 다양한 경험들이 자연스레 쌓여 단단한 나만의 관점이 생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대로 남의 상황을 임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함정에 빠질 기미가 느껴지면 종종 이 말을 떠올린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세요. 지금 그 사람은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괜히 스스로 남들을 향한 어쭙잖은 오만한 판단이 밀려올 때 항상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의 삶이 귀한 만큼 남들의 삶도 소중하다고 말이다. 앉은 자리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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