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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07. 2023

'호이포이 캡슐'과 물욕

 워낙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흥미로운 신간들이 나오면 웬만하면 사 보는 편이다.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전자책은 아직까지 침을 묻히며 넘기는 종이책의 생생한 기분을 느끼기에 부족하다. 유명 인터넷 서점의 골드회원 자격을 몇 년째 유지하는 것도 다 이런 욕심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온 집안 구석구석에는 다 읽은 책들, 다 읽지 못한 책들, 혹은 읽어야 하는 책들로 넘쳐난다. 예전에 중고로 많은 책들을 처분했는데도 몇 년 새 또 그만큼의 책이 쌓였다.


 얼마 전, 수업 혹은 독서토론에 필요한 또 몇 권의 책들을 구입하다가 ‘아뿔싸’하는 마음이 들었다. 방안, 혹은 거실 곳곳에 쌓인 책들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정리정돈에 둔감한 내가 보기에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쯤 되면 안 읽는 책이나 필요 없는 책들은 처분해야 새로이 다른 책들을 살 여력이 생길 듯싶다.


 어떤 책들을 버려야 하나? 멍하니 책꽂이들을 살펴보는데, 버릴 책들 고르기가 참 난감하다. 저것은 다른 수업 때 필요한 책들, 이것은 언젠가 읽으려고 놓아둔 책들, 요것은 두고두고 계속 봐야 하는 책들인데...... 그렇게 이것저것을 따지다 보니, 또다시 버리기 싫은 마음이 도졌다. 책 정리를 할 때마다 항상 이렇게 모질지 못하고 물렁한 결단력이 문제다. 한번 손에 들어온 이상,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강한 탓이다. 그럴 때마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부르마가 들고 다니던 ‘호이포이 캡슐’이 생각난다.


 일본 만화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은 주인공 손오공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드래곤볼 7개를 모두 모으면 어떤 소원이라도 하나만 이루어준다는 내용을 다룬 만화이다. 이 만화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한때 한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에서 게임모티브로 사용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호이포이 캡슐’은 만화 캐릭터 중 한 명인 부르마가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들이 든 작고 가벼운 캡슐이다.


 부유한 기업의 후계자인 부르마는 야외로 여행을 갈 때 여러 짐들을 무겁게 들고 다니지 않고 콩알만 한 몇 개의 캡슐만 들고 다닌다. 그녀가 그 캡슐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던지면 놀랍게도 오토바이, 비행기,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가전제품이 딸린 집 등이 순식간에 나타난다. <드래곤볼>에서는 어떤 원리로 그런 물건들이 그 캡슐에 들어가 있는지, 혹은 보관할 수 있는지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화를 볼 때마다 내심 그런 캡슐이 있다면 매일 쾌적하게, ‘미니멀 라이프’로 살 수 있겠구나 싶어 욕심이 났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는 불필요한 물건과 일을 줄여 단순함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이다. ‘미니멀 라이프’의 효시는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로 여겨진다. 그는  2년 넘게 월든 호숫가 숲 속 오두막에서 자급자족하며 지낸 후 저서 <월든>를 발간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미니멀 라이프’는 소로우의 방식과는 살짝 다른 듯싶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몇몇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때, 삶의 변화보다는 집안 물건 정리와 버리기에 더 치중하는 것 같다. 뭐, 그들의 방식이야 어떻든, ‘미니멀 라이프’가 더 쾌적한 집안 환경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미니멀 라이프’를 계속 유지하기엔 너무도 유혹적인 자본주의 환경이다. 현대인들은 계속해서 본인들의 구매 욕구를 충동질하는 과도한 소비환경과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발전의 자극 속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사야 할 물건들은 끝없이 늘어난다. 트렌드에 맞게 따라야 할 유행이 있고, 기계들은 끝없이 발전한다. 아무리 최신 가전제품, 유행에 맞춰 옷을 산 들, 1년만 지나면 금방 그 빛이 바랜다. 하루 종일 사용해도 ‘빵빵’하던 핸드폰의 배터리 역시 4년만 지나면 몇 시간 새 금방 방전되는 고물로 바뀐다. 홈쇼핑에서 산 의류들 역시 1년만 지나면 실밥이 터지고 색깔이 변하는 후줄근한 헌 옷들이 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물건을 사야 할 것 같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런 반복적인 소비 행태가 고작 몇 년조차 유지할 수 없는 빈약한 기술력 때문인지, 아니면 나날이 사람들의 물욕을 자극하는 광고주들의 계략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넘쳐나는 물건들, 책들 속에서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이다. 몇 년째 변화가 없는 무질서한 집안을 생각하며 비겁하게 변명거리를 생각해 본다. 집안에 꽉 찬 물건들을 단호하게 버리지 못하는 나의 유약함 때문일지, 아니면 매번 내 소비욕구를 부추기는 광고주의 마법 때문일지 알 수 없다. 차라리 부르마의 ‘호이포이’ 캡슐이라도 내 손안에 있다면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망상도 해본다. 보관하고 싶은 책들, 새로 사고 싶은 책들을 모두 그 캡슐 속에 보관한다면 집안 환경이 좀 쾌적해질 것 같다.  


 한 개, 두 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보관하는 캡슐들이 하나씩 늘어나 집안 가득 ‘호포이 캡슐’ 수백 개가 쌓인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른다. 갑자기 천상의 아이템 같았던 캡슐’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또 다른 물욕의 집합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만화 <드래곤볼>에서는 부르마가 콩알만 한 캡슐을 땅에 던지면 원하는 물건들, 집이 언제든 순식간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 ‘호이포이 캡슐’ 역시 어떤 환경에서든 편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어긋난 욕망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기상천외한 보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꽉 막힌 상황을 쾌적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물건에 대한 미련을 비우고 가다듬는 마음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호이포이 캡슐’조차도 사람들의 지독한 물욕까지 해결하지 못한다. 결국, 미련을 버리고 집안의 책들을 모두 꺼내서 정리하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보관하는 캡슐이 아니라 비울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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