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진주 Oct 10. 2023

한글날의 원서낭독

 매주 월요일 밤 9시 10분부터 10시까지는 줌으로 영어 원서를 낭독하는 시간이다. <The moon and Six pence>(달과 6펜스)를 시작으로 <Stoner>(스토너) 낭독을 지난주에 마쳤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는 <Crying in H Mart>(H  마트에서 울다)를 읽기 시작했다. 현재 이 원서를 같이 읽는 멤버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그들과의 인연은 원서 낭독 모임을 주관하는 주최자의 블로그에서 처음 맺었고, 지금까지 온라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신기한 점은,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책을 읽기 위해 몇 달을 넘게  만났는데도 서로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들과는 비디오도 없이 오로지 목소리로만 교류하고 있다. 물론, 원서 낭독을 할 때 굳이 상대방의 개인 정보까지는 알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가끔은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원서낭독에 공을 들이는지 궁금하다.


 나에게 있어서 영어는 항상 놓치고 싶지 않은 ‘평생의 숙제’였다. 학창 시절에는 ‘시험’ 때문에 영어공부를 했고, 직장을 다닐 때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했다. 결혼을 하고 더 이상 영어를 쓸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공부를 지속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동안 해왔던 영어공부가 아까워서, 언어구사의 느낌을 까먹고 싶지 않아서 계속 공부를 한다. 한때는 수험생처럼 영어 그래머를 매일 공부하고, 영어 문장들을 무작정 외우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다 옛날일이다. 요즘은 매주 1번 영어원서 낭독을 하고, 매일 새벽 6시 10분, 필리핀 강사와의 10분짜리 전화영어에 투자하는 정도가 현재 하고 있는 영어공부의 전부다.


 한창 영어공부에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어렸던 우리 아이들을 영어 학원대신 ‘엄마표 영어’로 가르치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치열하게 영어 공부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 갈수록 점점 학교시험에 필요한 전문적인 영어공부가 필요했고, 내 능력으로 점점 감당하기가 버거워졌다. 결국, ‘그래, 시험 영어는 학원에서 배워야지’라며 ‘엄마표 영어’를 포기했다. 그러고 나니 영어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목표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영어공부를 시작할 때 “왜 영어 공부를 하냐?”는 원어민 선생님들의 단골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위해서’, 혹은 ‘여행 영어를 위해서’ 혹은 ‘영어가 좋아서’라는 문장들을 번갈아가며 대답했다. 지금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예전에는 국가가 나서서 ‘국제화’를 부르짖는 시기가 있었다. 자연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만능패스’처럼 열렬하게 환영받았다. 무조건 영어공부는 해야 했고, 어딜 가나 토익점수, 영어회화 능력은 필수였다. 하지만 요즘은 굳이 영어를 못해도 핸드폰의 언어 번역기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건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렇게 12년 넘게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영어를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지 않아도 괜찮은 시대이다. 게다가 한글의 위상이 또 얼마나 높아졌는가? 한때 영어를 공부하던 이들이 꿈꾸었던 ‘세계 어디에서든 한글이 통하던 시대’가 단지 신기루만은 아니다.


 BTS를 비롯한 여러 한류스타들, 드라마, 화장품 등 K컬처가 만들어낸 한글의 인기가 생각보다 뜨겁다. 다른 나라에 사는 파랑 눈의 외국인들이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글을 본인 민족의 글자로 사용한다는 짜이짜이족의 이야기는 더 이상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몇 달 전 인터넷 기사에는 “최근 한국어 배우기 열풍으로 세종학당의 수강인원은 누적 66만 명이고, 현재 대기 인원이 1만 명을 넘었다는 국회 분석 자료가 공개”되었다.(출처: 헤럴드 경제, 2023.02.13) 한마디로 한글의 전성시대이다. 이쯤 되면 영어를 사용하던 영미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도 우리말을 가르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영어를 예전만큼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국어, 영어, 수학’에서 영어는 아이들이 당연히 잘해야만 하는 과목이다. TV에서 외국인들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유명인들을 보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기에 영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한때 비영어권 나라 국민들이 영어구사를 자유롭게 하는 교육 현실과 우리의 꽉 막힌 영어 환경을 비교하며 한글과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도입하자는 논란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놀랍도록 달라진 한글의 위상은 너무도 기꺼운 일이다. 그럼에도 영어는 영원히 지니고 가야 할 우리들의 숙제이다. 이런 마음이 외국인을 만나면 무조건 영어를 해야 한다는 ‘비굴하고 친절한 마음’때문일지, 아니면 영어 공부를 위한 ‘순수한 탐구심’ 때문일지는 알 수 없다. 오늘은 제557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애민정신으로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님을 생각해서라도 영어는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와 조금 많이 다른 세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