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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20. 2023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어디로 갔을까?

 요즘처럼 우리 아이들이 다 커서 다행이라 느낀 적은 없다. 정확히 표현하면, 병원에 자주 들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해져서 천만다행이라는 말이다. 아이를 낳고 키워본 엄마들은 알 것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 병원 문턱을 수십 번씩 들락거릴 수밖에 없다. 아기들은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아프고, 예방접종할 일은 많은지, 그 당시 소아과는 동네마트보다 더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말 못 하는 갓난아기 때부터 어느 정도 체력이 키워지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말도 안 통하고 열이 나서 끙끙거리는 아이들을 부여 업고 병원에서 부단히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오죽하면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소원이 무조건 소아과랑 가까운 집이었을까?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확실히 병원을 들르는 횟수가 줄었다. 기껏해야 농구하다가 발목이 삔 아들들을 데리고 구시렁거리며 정형외과에 들르는 정도가 다이다. 그런 탓에 자주 가던 동네 소아과 병원이 몇 년 전에 이전을 한 사실도 몰랐다.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다녔던 소아과병원들은 예전부터 자주 위치를 옮기거나 폐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없어서 그런 건가’라고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항상 병원에는 아픈 아이들 환자들과 보호자들로 넘쳐 났다.


 자주 다녔던 동네 소아과 병원 원장님을 우연히 다시 만나 이전 이유를 들으며 그때 가졌던 궁금증이 풀렸다. 나이 지극한 아줌마 원장님은 우리 동네에서 아이들의 수가 점점 줄어 병원을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지타산(어떤 일이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따져 보는 것)이 맞지 않아서 말이다.


 몇 년 새 의료공백에 대한 특집기사들이 부쩍 늘었다. 요즘 소아과를 전공하는 의사들이 거의 없고, 응급실 자리가 없어 환자들이 사망했다는 사연들을 읽으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정말 고맙게도, 우리 아이들은 소아과를 더 이상 들르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고, 우리 부부 역시 한밤중에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의 급한 위기가 없었다. 하지만 나이는 점점 들고 체력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마냥 지금의 행운에 안심할 수 없다. 그런 탓에 환자들의 생명과 필수적인 병들을 책임지는 의사들이 많이 없다는 현실이 너무 불안하다. 이렇게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피부를 가꾸고 쌍꺼풀 수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도 현실의 의사들은 자꾸만 성형외과, 피부과로만 몰리고 있다. 마치 과거 미국 서부로 금을 찾으러 떠났던 대규모의 ‘골드러시’처럼 말이다.


 현실의 불안한 의료 공백을 메꾸고자 정부는 과감하게 칼을 빼 들었다. 그동안 제한되었던 의대정원을 과감하게 늘리기로 한 것이다. 2023년 10월 17일 <세계일보>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고교 2학년생들이 대입을 치르는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린다는 방침을 전제로 구체적인 규모와 배정 우선순위, 의대 및 의학전문대학원 신설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고 했다. 그다음 날, 보건복지부는 “'필수의료 혁신 전략'은 필수의료 전달체계 정상화, 충분한 의료인력 확보, 추진 기반 강화 등 3대 핵심과제로 구성됐으며, 국립대 병원 등을 중심으로 필수의료 전달체계를 강화하는 방안”(출처: 연합뉴스 2023.10.19)을 발표했다.


 하지만 의사협회는 의대정원 확대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즉각 반박에 나섰다. 대한의사협회장을 지낸 주수호 미래의료포럼 대표는 10월 17일 ‘전국 전공의들에게 고합니다’라는 제목의 메디게이트뉴스 칼럼을 통해 “지금은 우리 의사들이 의대 입학 정원 확대를 저지해 대한민국 의료를 서서히 망할 수 있게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료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려 급속히 망하게 하는 것이 의사들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세울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는 의사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계속 의대 정원확대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필수의료에 매진하지 않는 방법으로 투쟁하자”며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저들이 먼저 살려달라고 매달릴 때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출처: 세계일보, 2023.10.19)


 솔직히 의사들이 의대정원확대에 대해 왜 그렇게까지 극렬하게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가 아닌가. 소아과 의사들이 부족해서 아이들은 진료받기가 힘들고, 응급실 의사들이 없어 1분 1초가 위급한 환자들이 뺑뺑이를 돌고 있는 상황이다. 지방의 환자들은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진료를 받기 위해 커다란 짐꾸러미를 들고서 먼 길을 떠나고 있다. 이 일은 비단 ‘크고 잘 알려진 브랜드 병원이 잘한다’는 환자들의 맹신 때문만은 아니다. 지방에는 더 이상 진료할 의사가 없고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이다.


 의대에 가고 싶은 입시생들은 해마다 늘어나는데 왜 이렇게 의사들은 부족한 지 알 수 없다.  의대정원은 2006년부터 3058명으로 묶여있다. 지금도 진료할 의사들이 없어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받거나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의사협회는 정부가 시도하려는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리려는 정치적 발상은 의료를 망가뜨리고 국민 건강을 위협할 것”(출처: 서울신문 2023.10.17)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대정원을 지금보다 늘리면 앞으로 더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무서운 혼란이 닿칠지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금의 현실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무엇일까?


 단순히 의대 정원만 늘려서 지금의 의료시스템이 나아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의협의 주장처럼 의대생들을 교육시키고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의료여건이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 확대는 ‘독’일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비록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진료 파업까지 강행하며 무조건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모습이 무섭다. 마치 그들이 ‘밥그릇’ 싸움에만 연연하는 정치인들처럼 보여 불편하다. 의사들의 손과 머리만 바라보며 생명을 맡기고 있는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소소한 말과 생각은 신성한 종교보다도 강하다.


 몇 년 전에 방영했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나의 최애 드라마이다. 그동안 몰랐던 의사들의 고통과 사명감을 엿볼 수 있어 병원에서 만나는 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현실 속 의사 선생님들은 이 드라마가 모두 ‘허구’라며 싫어한다고 들었지만 말이다. 이런 메디컬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의대 졸업생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부분이다. 이 문서는 기원전 5~4세기에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쓴 의학 윤리를 담은 기록물이다. 우리나라 의대 졸업생들은 1948년에 채택된 <제네바 협정>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낭독한다고 들었다.


〈제네바 선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의 스승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다.

나의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겠다.

나의 환자에 관한 모든 비밀을 절대로 지키겠다.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다.

나는 동료를 형제처럼 여기겠다.

나는 종교나 국적이나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

나는 생명이 수태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

어떤 위협이 닥칠지라도 나의 의학 지식을 인륜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의 명예를 걸고 위와 같이 서약한다.


 개인적으로 의사들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의술과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고,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의사들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의학을 전공하리라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들은 고귀한 사람들이다. 제발 예전에 다짐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어 더 이상 환자들을 외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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