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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소년이 아버지가 되다

by 하늘진주

요즘 tvN 방송의 <김창옥쇼 리부트>에 푹 빠져있다. 김창옥 씨는 재치 있는 유머와 따뜻한 공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는 소통 전문가이다. 이 방송은 매회 주제에 따라 방청객들의 사연을 듣고 김창옥 씨가 그 문제들의 이면들을 때로는 재치 있게, 때로는 따뜻하게 풀어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김창옥쇼>를 보다 보면 사람들이 지닌 사연과 아픔들이 다 비슷하구나 싶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특히 김창옥 씨가 풀어내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심리와 부부 사이의 일화를 들으면 무척 재미있다. 남편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화나서 씩씩거렸던 과거의 내가 생각나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이번 주에 방송한 5회의 주제는 <내 남편 혼내주세요>였다. 김창옥 씨는 “어른스러운 남자와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아이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으세요?”라고 첫 질문을 던졌다. 사실 남편으로서는 어른스러운 남자가 더 좋을 것 같지만, 경험 상 그런 남자는 무척 드물다. 어른스러운 남자가 있기는 할까? 이 질문을 들으며 문득 남편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때 남편은 무척 듬직하고 내 편을 다 들어줄 것 같은 남자 같았다. 물론 결혼하고 바로 그 환상들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지만 말이다. 신혼 때의 남편은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철부지 사내아이 같았다. 그것도 서른 살이 넘어도 영원히 철이 들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매번 친구들과 후배들을 신혼집으로 불렀고 그들을 위해 난 서툰 요리솜씨로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다. 가끔 짜증도 났지만, 워낙 집에 온 사람들을 보고 신나 하는 남편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남편은 지금의 내가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칠 만큼 철이 없어 보였다.


사실 남편은 나와 같은 IMF 때문에 피해를 본 취업동기였다. 그 당시 그가 나온 학과는 대학만 졸업해도 취업이 보장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좀 더 좋은 커리어로 취업을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고 무사히 석사과정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그해 대한민국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렸던 IMF가 터졌다. 잘 나가던 기업들도 줄줄이 도산하던 암울했던 상황에서 남편은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작은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그리고 1년 뒤 소개팅으로 4살 어린 나를 만났다.


마지못해 들어간 회사라 그런지 남편은 그 회사에 큰 애정이 없었다. 그는 술을 자주 마셨고 꽉 막힌 회사 상황들을 답답해했다. 그렇게 술을 거하게 마신 다음 날 아침에는 여러 이유를 대며 매번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그게 그 회사의 분위기라고 했다. 두 식구가 한 달을 살기에도 빈약한 월급이 들어오던 날이면 항상 나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종종 몇 해 먼저 대기업에 취업해서 잘 나가던 대학동기들과 비교하며 힘들어했다. 그럴 때마다 난 "괜찮다"라고 말했다. 빠듯한 생활비와 매번 나가던 경조사비를 결혼 전 직장생활에서 모았던 내 비자금으로 메꾸며 남편이 힘을 내길 바랐다. 사실 남편이 얼른 정신 차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큰 애를 임신하고 모았던 비자금의 통장 잔고가 모두 바닥이 되던 날, 여전히 철없어 보였던 남편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이제는 우리에게 아이도 생기고 모아둔 내 비자금이 없으니 당분간 이런저런 경조사 비용들은 줄여야 한다고 말이다. 남편은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훗날 그는 결혼 1년 동안 본인 월급으로 모든 경조사들과 생활을 꾸리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고 했다. 이후 남편은 ‘월급한량’ 생활을 접고 지금 다니는 대기업으로 옮겼다. 그동안의 철부지 아이 모습들은 모두 벗어던진 채 말이다.


철부지였던 남편이 아이들을 키우며 점점 아버지가 되어간다. 밤새워 술 마시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했던 사내아이가 이제는 조금씩 아버지의 향기를 풍긴다. 빠르게 앞만 보고 걸음만 옮기기 바빴던 남편이 목요일이면 둘째가 좋아하는 다코야끼 한 박스를 사기 위해 기꺼이 푸드 트럭 앞에서 기다린다. 매주 큰 애를 위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동차 핸들을 잡는다. 본인만 알았던 철없던 소년이 아이들과 가족들을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철부지 소녀도 아이들을 먼저 챙기는 엄마가 되었다.


오늘도 이른 새벽, 가족을 위해 허겁지겁 회사 통근 버스를 타는 남편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던 어린 남자아이가 이제는 조금씩 아버지가 되어간다. 그 옛날 친정아버지의 어깨에서 보았던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남편에게도 보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야만 볼 수 있는 가족을 위한 무게가 남편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큰 애가 종종 말한다. 자기도 결혼하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20년의 세월, 철없는 소년이 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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