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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숙성되는 시간을 기다리다.

by 하늘진주

우리 아이들이 나온 초등학교에는 호랑이 돌상 하나와 사자 동상 하나가 떡 하니 교문을 바라보고 있다. 두 동물은 회색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떡 벌린 입매가 용맹하면서도 신비스럽다. 꼭 세상의 선악을 판단한다는 전설 속 동물, 해치와 비슷한 모양새다. 두 동물이 얼굴 가득 근엄한 표정으로 초등학교 교정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상상력이 마구 떠오른다. 저 동상들은 누가 선물했을까? 왜 호랑이와 사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에 교무실에 찾아갈까 생각도 종종 했다.


무언가에 대해 상상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SF 소설, 판타지 소설은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장르 중 하나이다. 어떤 이는 이런 소설류는 너무 허무맹랑하고 괴상해서 싫다며 손사래를 치곤 한다. 하지만 난 상상력의 세계가 왜 이렇게 읽을 때마다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이 세계에서 떡하니 진실로 이루어지면 세상의 비밀을 엿본 기분이다. 창조자의 생각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세계가 무척 흥미롭다. 무채색 세게에서 훌뿌리는 마법의 비처럼, 사람의 공상은 현실의 메마른 사고를 촉촉하게 적시는 힘이다.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SF 소설은 한 청소년의 삼선 슬리퍼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 신발은 고등학생들이라면 교복처럼 신고 다니는 슬리퍼였다. 작가는 이 빈약한 신발이 사실은 지구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열쇠라는 설정으로 독자들의 허를 찔렀다. 외계인의 음모를 눈치챈 주인공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라니... 그 황당한 상상력이 너무 기발해 책을 읽는 동안 한참을 웃었다. 그 뒤 아이들이 신고 다니는 삼선슬리퍼를 보면 어딘가 있을 우주의 메시지를 생각하며 연신 키득거렸다.


국회의사당 동그란 돔 지붕의 비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오빠는 이 지붕 속에 적군의 핵무기를 막기 위한 로봇 태권브이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63 빌딩 옥상에 있는 커다란 안테나가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한강변에 비치면 그 빛을 받아 돔의 지붕이 열리고 로봇 태권브이가 나온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 저 푸른 돔 지붕이 언제 열릴까 한참을 기다렸다. 어쩌면 '로봇 태권브이', '매칸드 브이', 혹은 '독수리 오 형제'를 열심히 보던 오빠가 어린 여동생을 놀리기 짓궂은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는 그 말이 진실 같았다.


요즘은 어릴 때보다 공상하는 버릇이 많이 줄었다. 사실 뭔가를 상상하기보다는 현실을 많이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졸업한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면 호랑이 돌상과 사자 돌상이 숨겨둔 이야기가 궁금하다, 모두가 잠든 까만 먹물 같은 밤,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학교 교정에서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언젠가 두 돌상을 소재로 멋진 이야기를 구상하고 싶다. 마음에 드는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하염없이 돌만 바라봤다는 석공처럼, 나도 역시 상상력이 좀 더 숙성되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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