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첫날이다. 달력이 ‘11’이라는 숫자를 달고 보니 수능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실감 난다. 그동안 뿌연 안개가 뒤덮인 걱정의 끄트머리 산에서 막연하게 헤맸는데, 드디어 피하고 싶었던 두려움의 산 정상에 올라온 기분이다.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에 휩싸일 때면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생각난다. 이 명화는 울퉁불퉁한 어두운 바위 위에서 저 너머 안개가 자욱한 풍경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지팡이 하나에 의존해서 결연하게 서 있는 이 사람의 모습이 무척 쓸쓸하다. 미술 평론가들은 이 그림이 포효하는 대자연과 맞서려는 인간의 집념과 의지를 그린 작품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볼 때면 그 너머의 세상을 갈구하며 두려움에 떠는 한 남자의 불안이 더 크게 다가온다. 올해 입시를 치르는 우리 아이 역시 이 고비만 넘으면 또 다른 길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 남자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절벽 위에 서 있는 듯하다.
점점 수능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고3 아이들 사이에서는 내년 입시를 고려한 재수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시험을 치르지 않은 상황에서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혹은 비겁하고 성급한 결정이라고 혀를 찰 수도 있다. 현재 상황에서 아이들은 그런 ‘재수’라는 얄팍한 희망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한 하루하루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 온 학생들도, 입시 준비에 큰 관심이 없었던 학생들도 수능시험이 주는 왕관의 무게는 두렵고 벅차다.
올해 수능은 유달리 갑작스러운 변수가 많은 시험이다. 올해 6월, 수능이 5개월 남은 상황에서 '모든 킬러문항을 없애라'라는 높으신 분의 한마디에 기존의 모의고사 문제 유형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수능 문제 출제를 총괄해야 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갑자기 경질되었다. 고3 수험생들은 '입시 카르텔'이라는 이름으로 대치동 학원가들과 인터넷 강의 유명 강사들이 모두 압수수색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번 수능은 준비하는 학생들도, 함께 입시를 도와주는 기관들도 혼란스러움을 가득 안은 채 시작된 시험이다. 아이들도 부모들도 시시각각 거세게 흔들리는 ‘입시’ 보트 위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수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원래 수험생들은 고3 때 치르는 6월 모의고사, 9월 모의고사를 보면 대충 본인의 수능 점수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그때의 성적으로 어느 대학에 수시지원을 할지, 아니면 좀 더 정시 준비에 매진할지 선택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기존의 입시 공식이 모두 깨졌다. 도대체 어느 정도 점수와 등급을 받아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킬러 문항’이 없어지고 올해 수능을 치르는 현역 고등학생 비율이 역대 최저라는 이야기에 반수생, 재수생 등 N수생들이 대거 수능 현장으로 대거 밀려들고 있다. 한마디로 현역 고등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시 싸움이다.
보통 전쟁터에서 급박한 상황에 몰리면 '배수진을 친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강을 등지고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말이다. 강물에 빠져 죽든지 아니면 싸우다 죽든 지 매한가지인 상황이다. '모든 것을 걸고,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의 마음으로 싸우지 않으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현재 고3 아이들에게 '배수진을 친다'라는 말은 '재수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번 입시에 올인한다'라는 의미다. 그 선택을 한 학생들은 올해 원하는 대학에 꼭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있다.
반면 고3 아이들에게 '후퇴한다'라는 의미는 '재수'를 생각하며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 수능은 한 번도 큰 시험을 치르지 않은 현 고3 아이들에게 너무도 불리한 싸움이다. 다른 재수생, N수생들처럼 수능 고사장에서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겪은 적이 없다. 그동안 수행평가며 다른 내신들을 챙기느라 수능 준비가 재수생들보다 한참 늦었다.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놈의 모의고사 성적’은 오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저히 N수생들의 수능성적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고3 아이들과 부모들은 너무도 쉽게 ‘재수’를 먼저 떠올린다. 상상할 수 없이 두려운 적들을 눈앞에 두고 마지못해 후퇴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 이제 겨우 수능으로부터 14일 남은 우리 큰애에게 ‘입시의 배수진’을 치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채찍질해야 할지, 아니면 ‘내년 입시가 있으니 힘내라’라고 희망 고문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길, 그래서 두려운 순간이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그저 함께 자욱한 안갯속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