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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한 문장으로 온종일 생각하다

by 하늘진주

매일 글을 쓰는 훈련을 하다 보면 하루쯤은 편안하게 여유를 가지고 한 문장을 깊이 생각하고 싶다. 정해둔 마감에 쫓기며 글을 쓰면 깊이 문장을 생각할 여유도, 매만질 시간도 부족하다. 마감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문장이 딱딱하고 조급하다. 여유롭고 동글동글한 감성보다는 차갑고 논리적인 이성이 우선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어른의 말글 감각>(김경집, 김영사)의 3장에는 ‘낱말/문장 만지기’의 중요성에 관해 서술한다. ‘낱말 만지기’는 “단순히 기호로서의 문자에 담긴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 “모든 이성과 감성, 그리고 감각을 총동원해 입체적으로 알고 느끼고 반응하는 것”(p.121)이라고 정의한다. ‘낱말/문장 만지기’는 특히나 섬세한 사유와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이다. 이 시간은 글 쓰는 사람의 ‘잠재적, 창조적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과정이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따뜻한 가을 햇빛을 벗 삼아 며칠 전부터 굉장히 신경이 쓰였던 한 문장을 만져 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글을 읽다 보면 유난히 마음속에 콕 박히는 문장이 있다. 글쓴이의 깊은 사고와 성찰이 묻어난 탓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편안하게 써 내려간 글귀가 그때의 내 상황과 공명해서 더 강하게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른다.


이 문장은 글동무들의 글 마당을 서성이다 발견한 글귀였다. 글동무는 일산 호수 공원에서 제법 쌀쌀해진 가을 풍경과 그동안의 삶을 깊이 반추하며 글을 썼다. 사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는 이맘때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쓸쓸한 가을 감성의 글인 줄 알았다. 저물어 가는 가을이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고 철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글동무의 글을 무심히 읽어 내려가다 한 문장에서 마음이 멈춰 버렸다.


내가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는 유독 가을과 닮아있다.”


글동무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구절과 <소년>을 인용하며 윤동주 시인의 시와 닮은 가을에 대해 노래했다. 그녀가 표현하는 가을은 ‘슬프도록 아름답지만, 인생을 겸허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었다. 다가오는 시린 겨울을 대비하며 그동안 가득 채웠던 감정의 찌꺼기를 거르고 다시 평안함으로 채우는 시간이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별 헤는 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소년)


이상하게도 나에게 있어서 윤동주 시인의 시는 가을이 아니라 겨울의 이미지로 먼저 다가왔다. 제일 처음 접한 시가 <서시>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유독 시린 겨울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서시>


이런 생각은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를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마음으로 그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고 선언하는 한 청년의 쓸쓸한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일 년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결연함이 느껴져 마음이 절로 숭고해졌다. 그런 탓에 나에게 윤동주 시인의 시는 울긋불긋한 배경으로 떨어지는 감성을 줍는 가을이 아니라 흑백 화면 속 눈보라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겨울이었다.


한 문장으로 온종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노란 가을 햇살이 시커멓게 저물어 버렸다. 글은 참 이상하다. 분명 기호로 이루어진 글은 생명력이 없는 생물체다. 그저 쓰인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단 몇 분이면 읽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의 숨겨진 의미들을 계속 파고들다 보면 몇 시간이고 곱씹으며 생각할 수 있는 마력이 있다. 이렇게 문장 하나로, 단어 하나로 하루 종일 생각할 수 있는 글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나만의 문장을 찾고 더 의미 있는 단어를 창조하기 위해 ‘낱말/문장 만지기’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낱말/문장 만지기’는 “섬세한 사유를 강화”한다. 기호를 만져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내용으로 수용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 짧은 순간에 엄청난 인식의 교환 작용이 일어나면서 무형의 자산, 즉 콘텐츠를 생산할 힘을 키우는 기본 요소가 된다. <어른의 말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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