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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들려주는 소리

by 하늘진주

가을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계절이다. 쓸쓸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마음속에 잠겨있는 모든 우울함이 함께 쓸려온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은 하얀 구름 속에 비치는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은 사방의 어두움과 함께 마음이 금방 쓸쓸해진다. 기쁘게도 슬프게도, 가을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쉽게 마음이 바뀌는 계절이다.


땅에 떨어진 낙엽을 따라 자박자박 걸었다. 여름내 푸르고 생기가 넘쳤던 나무들이 얼마 전 내렸던 비로 금방 앙상해져 버렸다. 거센 바람과 폭우로 한껏 두들겨 맞은 나뭇잎 옷들로 인도가 발 디딜 틈 없이 지저분하다. 자박자박, 저벅저벅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나뭇잎의 감촉에 기분이 좋지만, 저 많은 낙엽을 언제 치울까, 걱정이다.


가을의 시간이 조금 흐른 며칠 사이, 도로는 다시 깨끗해졌다. 길 한구석에 뚱뚱하게 채워진 여러 개의 마대자루를 보니 누군가 열심히 치웠다. 나만의 생활 속에서 요란스럽게 살아가는 동안, TV 속에서 남들의 이야기들을 시끄럽게 듣는 동안, 세상의 누군가 가을의 자취를 정리하고 있었다. 세상의 소음에 귀가 먹먹해져 있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모든 일들은 자기 몫을 다하며 흘러가고 있다.


겨울이 되기 전 가을은 마지막 힘을 다해 자기 소리를 낸다. 세상사에 취해서, 자기만의 고민에 잠겨있을 때 전혀 듣지 못하는 소리이다. 사람들이 올해가 다 가기 전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힘껏 달리는 것처럼, 가을도 올해가 가기 전에, 찬란한 아름다움이 무채색의 시린 풍경 속으로 잠기기 전에 제발 봐 달라고 조용히 애원한다.


가을의 첫소리는 여름의 더위가 가시고 빨갛게 나뭇잎들이 물들어 가을의 향기를 몰고 올 때, 마지막 소리는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타고 처연하게 나뭇잎들이 떨어질 때 들린다. 빨갛고 노란 단풍을 볼 때는 가을의 활기찬 아름다움에 마음이 들뜨고, 비바람에 스친 낙엽을 밟으며 걸을 땐 마지막 기력을 다해버린 가을 생각에 서글퍼진다. 시작은 아름다웠으나 끝은 쓸쓸해지는 가을이다.


가을이 조금씩 자연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세상의 글들이 자리 잡는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회의 소음에서 벗어나야지만 들리는 글 소리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눈을 감고 마음에 집중해야 비로소 들린다.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 서걱서걱 책장 넘기는 소리, 타닥타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 가을이 들려주는 소리에 온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11월의 달력이 달랑거린다. 높았다가 낮았다가 하는 푸른 가을 하늘과 함께 며칠 남지 않은 가을의 날들이 도망칠 준비를 한다. 험상궂은 동장군과 함께 달려올 무시무시한 겨울을 피해서 마지막 점검을 한다. 도망치는 눈부신 가을을 꼭 붙들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다가올 추운 겨울을 위해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던 생쥐 프레드릭처럼, 가을의 소리를 마음속에 조심스레 담는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의 음률, 파란 하늘로 날아가며 지저귀는 새들의 멜로디, 스쳐 가는 바람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책장 소리, 가족들의 도란거리는 대화들이 따뜻하게 잠겨온다. 올해 저장한 가을의 악보를 펼쳐보며 앞으로 다가올 겨울이 힘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11월의 어느 날, 이제 가을을 보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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