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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아파도 참아야 하는

by 하늘진주

어제 저녁부터 목구멍이 가는 모래가 낀 듯 깔깔하고 맑은 콧물이 자꾸 나온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부엌 찬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감기약을 집어 든다. 몇 주 전에 목이 아프다던 둘째를 위해 급하게 사 왔던 약이다. 아들과 아픈 감기 증상이 다르지만, 괜히 나를 위해 밖에 나가고 약국에 들러 감기약을 사는 과정들이 너무 번거롭다. 이러다 말겠지 싶은 마음에 급히 물 한 잔을 따라 감기약과 함께 집어삼킨다. 그까짓 감기쯤은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이른 새벽,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 소리에 맞춰 잠이 깬다.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어젯밤 삼킨 감기약이 무색하게, 아픈 증상이 여전하다. 아니, 어제보다 몸이 더 안 좋아진 듯싶다. 어제는 인후통과 콧물만 있었는데 오늘은 으슬으슬 오한까지 느껴진다. 오랜만에 찾아온 감기 녀석이 온몸 구석구석을 패고 다닌다. 이제 좀 쉬면서 몸을 보살펴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논술시험을 치는 큰 애와 함께 서울 시내 대학들을 찾아다니느라 온전하게 쉬지 못했다. 며칠 동안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과 부모들은 다 본듯싶다. 아이들이 우르르 학교로 시험을 치르러 간 빈자리, 피곤한 부모들은 긴 시간 쭈그리고 있을 자리를 찾아 카페들을 순례한다. 이미 만 원이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빈자리 하나 보이지 않는다. 카페로 걸어갈 힘 조자 없는 이들은 주차한 차에서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한 채 잠을 청하고 있다. 몸이 피곤해도 피곤할 수가 없고, 몸이 아파도 그 순간에는 아플 수가 없다. 부모라면 무조건 할 일은 다해 놓고 아파야 한다.


갑작스레 몸이 아플만한 원인을 찾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머리가 아프고 오한이 있어도, 해야 할 들은 당장 처리해야 한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둘째를 학교에 보내고, 큰 애 아침을 차린다. 그런 다음 약국에 들러야지. 그렇게 감기약을 사들고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집에 오니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빨랫감이 눈에 보인다.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지금 빨지 않으면 내일 불편해할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빨래만 하고 자야겠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빨래를 돌리고 나니 또 점심 차릴 시간이다. 밀린 설거지에 빨래를 다 널고 이제 좀 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며칠 동안 큰 애 논술 시험장에 따라가느라 끝내지 못한 내 일거리가 생각난다. 이번 주 수업이라 꼭 해야 하는 일들이다. 에휴, 달콤한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노트북 앞에 앉아 느릿느릿 타자를 두드린다.


겨우 일을 다 끝내고 나니 이제는 또다시 저녁 먹을 시간이다. 그렇지만 온몸이 무거워 도저히 새롭게 반찬과 국을 요리할 힘이 없다. 냉동실에서 대충 아이들이 좋아하는 떡갈비 몇 조각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고 추어탕 팩 2개를 물에 담가 둔다. 거실 시계를 힐끔 보니, 드디어 남편이 올 시간이다.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피곤한 모습으로 남편이 들어온다. 그때부터 하루 종일 참았던 피로와 별 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애들 아빠가 있으니 이제 좀 쉬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고부터, 부모가 된 순간부터는 아무리 아파도 아이들 앞에서 마음대로 아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정확하게 굴러가야 하는 시계처럼, 온몸의 피곤이 무겁게 눌러도 꼭 해야 할 일은 해야지만 아플 수가 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아프지 않은 이상, 참을 수 있는 아픔은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한다. 같이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배우자가 옆에 없다면 아무리 아파도 무조건 일어나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아픈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뭐 어쩌겠는가. 부모 자식 사이에 향하는 사랑의 무게는 항상 동등하게 저울질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처한 시간에 따라 사랑의 부피는 바뀐다. 어린 시절 넘치도록 받았던 부모님의 사랑이 이제는 아이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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