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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01. 2023

학생들의 손 글씨

 고등학교에서 비경쟁 독서토론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작성을 의뢰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엄밀히 말해서, 담당 선생님이 수업 내용을 잘 모니터 할 수 없으니 정식 생활기록부 작성 전에 학생들의 수업 내용을 상세히 적어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분기별 수업을 마치고 나면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작성을 하느라 무척 분주해진다. 특히 학생부 마감 기간이 있기에 12월이면 특히나 정신없이 바빠지는 시기이다.


 오늘 하루는 그동안 진행했던 학교의 워크지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느라 무척 정신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제출한 학생들의 짧은 서평들, 비경쟁 토론 후 나누고 기록했던 내용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수업 내용들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그중에서 무척 신경이 쓰이는 한 남학생의 활동지가 보였다. 글씨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개발새발’로 쓰인 워크지. 이름을 보니, 이 친구는 모 학교 비경쟁 독서토론 시간에 적극적으로 본인의 생각과 주장을 밝혀 인상 깊었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알아보기 힘든 글씨라니…. 한참 동안 이 남학생의 글씨를 해독하려고 끙끙거렸다. 분명 한글로 쓴 글이 분명한데 솔직히 쓴 내용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생활기록부를 작성할 때 아이들의 기록물은 무척 중요하다. 학생 수는 많고 교사의 기억력도 한계가 있기에 진행했던 수업 내용들을 모두 다 기억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느 선생님들처럼 나 역시도 수업 시간 이후에도 살펴볼 수 있는 독서토론 워크지를 종종 만들어 가는 편이다. 그 결과물을 토대로 진행했던 수업 내용과 연결 지어 생활기록부를 작성한다. 선생님들의 이런 심리를 잘 파악한 학생들은 실질적인 토론 활동보다 워크지 작성에 더 공을 들이곤 한다. 그런 점이 좀 불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파악하고 생활기록부를 섬세하게 작성하기 위해서는 활동지 제공이 필수이다.


 엉망인 글씨 때문에 내용 파악이 힘든 남학생의 워크지를 보고 있노라니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생은 토론 시간 내내 무척 적극적이었고 의견도 명확하게 잘 이야기했다. 생활기록부는 객관적인 결과물을 토대로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수업을 진행했던 선생의 특권으로 수업 중에 보고 느낀 인상적인 내용을 슬쩍 양념처럼 끼워 넣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친구만큼은 긍정적으로 잘 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도 엉망인 글씨 때문에 내용을 잘 파악하기 어려웠다.


 온전히 손 글씨만으로 긴 글을 쓰는 일이 드문 시대다. 예전 작가들처럼 원고지와 펜으로 생각들을 휘갈기고 오타가 난 종이들을 구기며 휴지통에 내던지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컴퓨터 키보드를 몇 번이면 글쓰기가 가능하고, 틀린 내용들을 ‘커서’ 몇 번으로 쉽게 지울 수 있다. 힘들게 손 글씨를 고집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교육 현장에서는 아직 종이 워크지로 수행평가를 보고 시험을 본다. 그렇기에 아무런 기계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기 힘으로 모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손 글씨로 또박또박 적는 ‘경필 대회’가 유행이었다. 손 글씨가 이쁘지 않아 그 대회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차분히 앉아 한글을 또박또박 적는 시간만큼은 참 좋았다. 손 글씨로 글자를 또박또박 쓰다 보면 성급했던 마음 역시 천천히 가라앉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경필 대회’에서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도 중요했지만, 또박또박 상대방이 알 수 있는 글씨체를 만드는 일 또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꼭 익혀야 하는 일이었다.


 요즘 학생들에게 손 글씨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작업이다. 특히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워낙 익숙해서인지 조금만 손으로 글씨를 써도 힘들다고 투덜거린다. 특히 남학생들이 손 글씨를 싫어하는데, 우리 아들들도 키보드가 아니라 직접 글을 쓰면 아무런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올망졸망하고 꼼꼼하게 예쁜 손 글씨를 쓰는 여학생이 수행평가에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모든 학생의 생활기록부 작성을 마친 후, 다시 한번 그 학생의 워크지를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암호 수준의 글씨이다. 하지만 계속 노려보다 보니 몇 가지 내용이 파악되었다. 물론 수업 시간에서 그 남학생이 보였던 그 활달하고 적극적인 모습들이 온전히 워크지의 글쓰기에 드러나지 않아 무척 안타깝다. 그래도 이 정도만 파악되어도 다행이다.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수업 시간의 그 남학생의 모습을 생각하며 생활기록부를 다시 수정했다. 뭐니 뭐니 해도 생활기록부는 수업 중 내용이 우선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정말 중요한 일에는 기본이 가장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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