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의 반복은 사람들의 권태를 부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신은 때때로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고난을 선물한다. 단 한순간도 떠올리기 싫은 고3 시절은 실은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그 시기가 싫든 좋든 대한민국 수험생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수험생이 된 아이와 일 년을 함께 보냈다. 학교시험과 모의고사 점수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큰 애의 마음에 절로 동화되다 보니 나 역시도 올해만큼은 한 명의 입시생이 되었다. 겉에서 지켜본 고3 수험생이 느끼는 마음의 계절은 남들과 다르게 흘러간다. 선배들의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추운 기온이 몰려오고 고3에 들어서면 드디어 길고 긴 겨울의 시작이다. 그렇게 고독하고 혼자만의 겨울을 지루하게 보내고 나면 어느새 수확의 계절, 11월이다. 또다시 길고 긴 겨울로 돌아갈지, 아니면 따뜻하고 찬란한 봄의 시간으로 탈출할지는 오로지 그날 수능의 성적에 달려있다. 평범한 일상의 복귀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D-9일, 드디어 수능까지 한 자리의 날에 접어들었다. 큰 애가 고3이 되고부터 매번 달력을 헤아리며 수능을 기다렸는데, 그날이 막상 다음 주로 다가오니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한다. 올해도 역시 수능일과 함께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동장군이 등장했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입시생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어김없이 수능 한파를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주변인들로부터 초콜릿과 찹쌀떡, 엿과 같은 수능 응원선물을 받으니 이제 얼마 안 남은 결전의 날이 손에 잡힐듯하다.
수능을 치르기 며칠 전부터 큰 애가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수능을 보고 난 후 절대로 시험이 어땠는지 묻지 말 것’, ‘둘째 수능 점수가 어떻게 나올 것 같은지 묻지 말 것’. 이 두 가지는 꼭 지켜달라고 했다. 시험 치고 가장 궁금한 것을 묻지 말라니…. 수능을 앞둔 아들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렵다. 나 역시도 입시의 시간이 이제 몇 달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막상 아들이 시험을 치르고 나면 홀가분하겠지만, 수능 점수 결과에 따라 요동칠 기분을 생각하니 두렵기만 하다.
되돌아보니, 고3 수험생의 일 년은 대한민국 사교육의 마법이 절정에 다다르는 시간인 동시에 자연스레 풀리는 시기이다. 아이가 성적을 신경 써야 하는 고등학생이 되면 ‘대학입시를 위해서’라는 목표로 사교육의 입김에 정신없이 끌려다니게 된다. 어떤 것이 우리 아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당장 눈앞의 성적 내기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다 입시 막바지에 이르고 더 이상 사교육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때야 ‘아, 공부는 스스로 해야만 한다’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또다시 사교육의 망령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굳건한 의지가 없는 한, 사교육의 강한 유혹을 뿌리칠 길은 없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올해 고3 수험생의 엄마로서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 입시제도에 관심을 가진 시간이었다. 내가 처음 수능을 치르고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반복되는 입시의 관행들이 안타까웠다. 예전의 학력고사에서 최초의 수능으로, 또다시 수시와 정시로 끊임없이 입시제도가 개편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성적 우선주의’는 현재진행 중이다. ‘고3 1년의 노력이 평생의 직업을 좌우한다’라는 말은 여전히 통용되는 진리이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특출한 재능이 있다면 밥벌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찾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배경도 돈도 없는 부모는 그저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는 잔소리만 반복할 뿐이다.
올해 입시가 끝나면 나 역시도 여느 선배 엄마들처럼 대한민국 입시제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언제 수시 원서를 접수하는지, 그리고 정시 원서는 언제 제출하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고달프고 힘겨웠던 경험들은 그 기간을 지나고 있는 현재 고3 엄마들의 몫으로 남긴 채 나 역시도 평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보낼 것이다. 그러다 둘째가 고3이 되는 날, 또다시 수험생 엄마로 사는 삶을 시작할 것이다.
가끔 궁금하다. 여전히 대한민국 고3의 일 년이 말이 많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고3의 일 년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행복한 시간이 되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부모 곁에서 어리광 부리는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는 귀중한 기간이다. 수능 성적으로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인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행복한 일 년이 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이 얼른 우리 입시계에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면, 두 손 올려 만세라도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