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진주 Nov 10. 2023

<숨결이 바람 될 때>(서평)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2016)


 나이가 들면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예전에는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삶이 좋았지만, 요즘은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이 더 고프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아마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이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진실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복한 미래만을 설계하지만, 편안한 죽음에 대해서는 계획하지 않는다. ‘죽음’은 차마 떠올릴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진리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흐름출판, 2016)는 서른여섯 살의 신경외과 레지던트인 폴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마주하게 된 마지막 2년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제목,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부르크풀크 그레빌 남작(카엘리카 소네트 83번)에서 따왔다. 이 시는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이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로 시작한다.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신이 만들어 놓은 영원의 시간 속에 한낱 인간의 삶은 숨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 숨결에 사람들은 성공, 돈, 야망, 질투 등 세상에서 풍길 수 있는 온갖 더러운 냄새를 입히며 삶에 집착한다. 이 숨결이 멈출 때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의 삶은 ‘영원의 굴레 속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구나’라고. 폴 칼라니티는 이런 진리를 너무도 젊은 나이에 깨달았다.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신경외과 레지던트의 마지막 기록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서정적인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책의 내용은 한 의사가 환자들을 바라보는 전문적인 병원기록과 함께 죽음과 삶에 관한 인문학적인 소양으로 가득하다. 이 독특한 조합은 저자 폴 칼라니티의 이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1977년 뉴욕 출신인 폴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에 조예가 깊은 수재였다.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던 폴은 모든 학문의 교차점에 있는 의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스탠퍼드 대학 병원의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일하던 그는 미국 신경외과 학과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을 받고 최고의 의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폴은 드디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으며 눈부신 성공만 앞둔 그 무렵, 갑자기 폐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폴이 아주 젊고 전도유망하며 따뜻한 의사였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가 다른 동료들처럼 야망과 욕심만을 좇는 성공에 눈먼 의사였다면 그의 죽음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외과 의사로서 그는 기계적으로 환자들을 살피기보다는 병 치료와 함께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돕”(p.112)고 싶었다고 말한다. 폴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민’을 베풀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 꼭 만나고 싶은 따뜻한 면모를 지닌 의사였다. 이것이 바로 많은 독자가 그의 죽음을 가슴 먹먹하게 바라보는 이유이다.


 나는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p.105-106)


 기술적인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지던트로서 내가 꿈꾸었던 가장 높은 이상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p.112)


 그럼에도, 죽음을 앞둔 젊은 의사, 폴을 마냥 동정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에 맞서는 태도 때문이다. 그를 치료한 의사 에마 헤이워드는 암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하나는 평소에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칭병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절망적인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그 병 때문에 더욱 평소 하는 일에 몰두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그것이다.” (p.278)


 하지만 폴은 죽음을 앞두고 용감하게 일어섰다. 그는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I can’t go on, I’ll go on).”(p.180)라고 외친다. 폴은 지금 그에게 남은 시간은 헤아리며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고,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고,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 (p.193)이라고 다짐한다. 놀랍게도, 그는 언급했던 모든 것들을 해냈다.


 이 책은 총 4개의 부분은 나뉜다. 저자가 쓴 부분은 암에 걸린 안 직후의 상황을 담은 ‘프롤로그’, 신경외과를 공부하기까지의 과정과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그린 1부 ‘나는 아주 건강하게 시작했다’ 와 암을 투병하며 죽기 전까지의 내용서술된 2부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 마라’까지이다. 나머지 부분은 폴이 죽고 난 이후 아내 루시 칼라니티의 기록과 추천사, 에이브러햄 버기즈의 글이다. 루시의 기록에서 보면 알겠지만, 폴은 이 책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미완성의 글이지만, 그의 아내 루시는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라고 말한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폴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미완성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폴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 신경외과의 최고참 레지던트였던 시절에는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p.251)


 죽음을 앞둔 폴이 이토록 절실하게 책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아내 루시는 생전에 했던 폴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전한다.


 그는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다. 삼십 대에 죽는 건 이제 드문 일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중략) “그냥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내 목표는 바로 그 정도라고 생각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p.252-253)


 폴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라고 외치며 열심히 삶을 살았다. 언젠가는 가야 하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며 세상을 떠났다. 독자들은 젊은 의사의 짧은 삶의 기록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먹먹한 기분이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폴 없이 외롭게 살아야 할 사랑하는 아내와 아직 어린 딸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맨 뒷장에 행복하게 웃고 있는 폴의 가족사진이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추천은 책 앞부분에 시인이자 의사인 마종기 님의 글로 대신해 본다. 이 책은 “시간을 아껴 좋은 작품만 골라 읽는 사려 깊은 분에게 이 책을 조용히, 그러나 정성스럽게 추천한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훌륭한 의사이자 용감한 한 인간의 삶을 보고 싶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정말 좋을 듯싶다.


 용감하게 삶의 불꽃을 불태우며 마지막 바람이 되어버린 젊은 의사, 폴 카라니티를 기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