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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5. 2023

나만의 글쓰기 버튼 재생시키기

 글에도 맛이 있다. 마음 상태에 따라, 기분에 따라 읽고 싶은 글이 달라진다. 마음이 여유 있고 기분이 좋을 때는 어떤 종류의 글이든 다 소화할 수 있다. 그 글의 분위기가 슬프거나 기쁘거나, 혹은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을 요구하는 글이든 상관이 없다. 어떤 글이든 다 소화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기분이 우울하거나 조급함이 감돌 때는 다르다. 글쓴이의 심란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 세상일의 상처에 대한 표현하는 글, 어둡고 슬픈 글은 읽고 싶지 않다. 현재 마음을 다독이고 기분을 감싸는 그런 글을 읽고 싶다. 그러고 보면 꽤 까다로운 글에 대한 미각을 가졌다.


 감정에 따라 읽고 살피고 싶은 글이 다르다 보니 때때로 글쓰기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신나게 글을 휘갈겨 쓸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한 자도 쓰지 못해 끙끙거리다 외면할 때도 있다. 생각해 보면 글쓰기는 참 복잡 미묘한 행위이다. 글쓰기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어떻게든 매일 꾸준히 글을 쓰라고들 한다. 하지만, 어떨 때는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도 든다. 생각을 쥐어짜도 쓰고 싶은 글이 생각 안 나면, 글쓰기는 “자, 이제 나와라, 뚝딱”하면 생기는 기성품이 아니라고 푸념하고 싶다. 가끔은 왜 이런 글쓰기 고민이 시작되었는지 고민할 때도 있다. 나만을 위한 일기가 이렇게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들의 일에도 공적인 일, 개인적인 일이 있듯이, 글쓰기의 스트레스도 혼자만을 위해 쓰는 글과 남이 볼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는 글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어 생기는 것으로 추측해 본다. 혼자만의 글에서 벗어나 더 큰 욕심이 생긴 탓일 수도 있다.


 사람의 일을 공적인 일과 개인적인 일을 구분하는 기준은 ‘돈’이다. 돈을 받는 이상 어떻게든 그 일을 기한 내에 끝내야 하고 어떤 시선도 견디며 그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어쩌면 그런 시선들이 자기 능력을 날카롭게 비평하며 바라보는 시선이라도 감당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일은 다르다. 가정 내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감정을 교류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100점 누구’라고 점수를 매기는 일이 있더라도 이런 표현은 서로의 관계가 돈독하길 바라며 쓰는 마법의 주문일 경우가 많다. 앞으로 나아질 상황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런 표현을 쓰며 서로의 관계를 도모할 필요는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일은 공적인 일과 개인적인 일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재미있게도, 글쓰기는 그 경계는 좀 모호하다. 개인의 글쓰기가 곧 공적인 글쓰기가 될 수도 있다. 쓰는 사람은 하나인데 시야가 달라지는 탓이다. 글쓰기는 언제나 ‘본인에게 말 걸기’에서 시작한다. 내 주변이 있었던 일, 마음에 대한 일을 조금씩 끄적이다 보면 어느새 글쓰기의 세상이 넓어진다. 혼자만의 친구에게 속삭이듯이 건네는 솔직한 자연스러운 고백의 문체들이 조금씩 단단해지고 영글어진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일기에서 벗어나 브런치 사이트에서 글을 쓰다 보면 문체가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속삭이듯이 썼던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글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조금씩 단장이 되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그때그때의 감정의 고백, 신변잡기식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자꾸만 글의 관점이 세상일로 넓어졌고 사회 속에서의 내 삶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글을 쓰는 마음이 피곤해지고 어떤 것을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생겼다. 글쓰기는 참 이상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또 다른 세상을 꿈꾼다. 수줍게 혼자만 보고 읊조렸던 글들이 세상에 나오며 다른 단계의 비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일 글을 쓰라고 하는 전문가들의 조언은 ‘혼자 보는 글’과 ‘남들에게 보이는 공간에서 쓰는 글’로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본인에게 하는 고백은 어떤 글을 써도 두렵지 않지만, 남들도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쓰는 글은 어쩔 수 없이 자기 검열에 휩싸인다.


 나를 위해 쓰는 글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는 글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애초에 사람은 본인의 관점에서 글을 쓰니,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글을 쓸 수 없다. 아무리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글을 쓰려고 해도 자꾸만 자기만의 관점이 새어 나온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적절하게 버무리느냐에 따라 본인만 보는 신변잡기식 글이 될지, 아니면 남들과 함께 보는 글이 될지 나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나의 경험과 생각을 표현하는 글과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는 글을 균형 있게 잘 쓸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한쪽에 치우치는 글은 어느 순간 마음속에 공허한 결핍이 느껴진다. 문제는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글과 드러내지 않는 글을 마음의 상태에 맞추어 균형 있게 쓰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서 종종 글쓰기 슬럼프에 빠진다.


 정여울 작가는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에서 글쓰기의 고통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 문장이라도 쓰고 싶은데, 시간은 부족하고 육체는 말을 듣지 않고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경우라도 꾸준히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감이 떠오를 때만 글을 쓴다면 일 년에 몇 편, 글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여울 작가는 “아무리 힘들어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면, 내 간절함의 온도에 놀라 내 무의식 어딘가가 글쓰기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만 같다”라며 무조건 쓰라고 말한다.


 100일 글쓰기가 지칠 때, 이런저런 책을 읽고 생각을 거듭하며 나만의 글쓰기 스위치를 다시 꾹 눌러본다. 이렇게 고민하고 쓰고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100일 글쓰기의 고지가 보이겠지. 100일 글쓰기 중 75일을 맞이한 날, 글쓰기가 삐걱거리는 나에게 소탈한 대화를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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