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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8. 2023

서울의 봄,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일으킨 비극


 올해 초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의 손자가 전두환 일가 및 그 지인들의 비리와 각종 범죄 혐의에 대해 내부고발 및 폭로를 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 그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가족이 출처 모를 검은돈을 쓰고 있으며 할아버지 전두환은 학살자"라며 자기 가족을 비판하는 글과 영상을 게재했다. 충격적인 폭로와는 달리 그를 둘러싼 잡음들은 아주 시끄러웠다. 어느 순간 그 폭로는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한때 대한민국 정부를 좌지우지했던 두 대통령의 행적은 누구나 욕을 하지만,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분야였다. 그들이 만들어 낸 권력의 거미줄은 대한민국 사회 곳곳을 뻗어나가 쉽게 끊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해져 버렸다. 그들이 활동했던 현대사는 깊이 파고들고 싶어도 건드릴 수 없는 금기였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은 우리 역사의 금기를 건드릴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첫 느낌이었다. 그만큼 강렬했고 분노가 치밀었다. 모두가 쉬쉬하며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사건을 이렇게까지 박진감이 넘치고 세밀하게 표현한 감독에게 먼저 존경을 표한다.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영화들은 내 취향이 아니다. 우선 학창 시절에 그 부분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역사 선생님들은 항상 일제 강점기 이후 부분은 ‘시험에 안 나온다’라며 후루룩 넘겼고, ‘새마을 운동’과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만 강조했다. 잘 알지 못하기에 현대사 부분이 재미가 없었고, 그 시절을 살펴보기가 싫었다. 이후 영화를 보며, 근현대사 역사책을 공부하며 다시 역사를 배웠다.


 학창 시절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남편은 이번 영화개봉을 알자마자 이렇게 단언했다. “‘1987’,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택시 운전사’을 보면 우리나라 현대사는 다 아는 셈이지.”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린 수많은 영화가 나왔지만, 이 모든 사건의 실질적인 원흉에 대한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을 살았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척 의미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씁쓸하지만 꼭 살피고 가야만 하는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서울의 봄’은 1968년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인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말이다. 이 기간은 장기 집권을 누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살해된 이후부터 1980년 5월 17일 사이를 일컫는다. 서울의 봄은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투입한 계엄군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229명의 사망자·실종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를 남긴 채 무력 진압되면서 종결됐다. (나무위키 자료 참조) 지독하고 비정했던 독재정권 속에서 꿈틀거렸던 자유의 기간은 너무도 짧았다. ‘군부 정부’가 아닌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꾸려질 때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영화 ‘서울의 봄’은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 이후부터 시작해서 수도 경비 사령관 이태신을 비롯한 진압군과 대치한 9시간을 숨 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야심만만한 보안 사령관 전두광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상호와 수사 문제와 군 인사 문제로 갈등을 일으킨다. 그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라는 말을 건네며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총동원해 정상호를 강제 연행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전두광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애쓴다. 한편 정상호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이태임과 다른 군인들은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군부의 군사 반란에 대응하려 애쓴다. 신군부는 최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이며 전투를 준비한다.


 ‘서울의 봄’와 같은 영화는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이다. 관객들은 전두광과 이태신의 숨 막히는 접전을 지켜보면서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이태신이 아무리 애를 쓰고 발버둥을 쳐도 이 쿠데타를 막지 못할 것이고, 전두광과 노태건 같은 파렴치한 군인이 앞으로 몇십 년 동안 승승장구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화가 치밀고 욕이 절로 나온다. 이런 군인들이 우리나라 권력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장악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나라를 위하는 정의롭고 참다운 군인들이 저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역사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의 씨앗을 그린 신군부 정권 탈환을 소재로 한 12·12 사태의 영화가 이제야 나왔다는 사실 또한 참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신군부의 자취가 강했고,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려웠을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런 탓인지,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12·12 사태의 주역들을 실명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 관객들은 신군부 보안 사령관 전두광, 그의 야심을 따라가는 인물 노태건, 그리고 보안 사령관 세력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이태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감독은 좀 더 자유로운 영화 연출을 위해 가명을 썼다고 제작 후기를 밝히고 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일 경우, 실명 거론으로 영화개봉하고 이런저런 논란거리가 많았기에 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이 영화는 민감한 현대사를 각색하여 아주 흥미진진하고 자유롭게 다루고 있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이 감독의 안전을 걱정할 정도로 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회는 그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의 봄’을 관람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 ‘1987’이 사람들이 제자리를 지켰을 때 벌어지는 영웅담을 담은 영화라면 ‘서울의 봄’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그린 작품이라고 말이다. 그저 신군부의 하루 동안의 촌극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국방장관과 군 중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제 임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벌어졌다. 국방장관이 끝까지 책임을 다했더라면, 군 중요 직분에 있는 사람들이 자가 자리를 지켰더라면, 아니 군인들이 조국과 국민을 위한 자기 사명감을 끝까지 인지했더라면, 전두광, 노태건이 일으킨 12.12 쿠데타는 절대로 성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의 봄’은 다시 들춰보기에도 수치스러운 우리 역사 한 장면이다. 부패한 정치인, 군인들의 횡포, 저 멀리 퇴보한 민주주의 그리고 그런 정부로 인해 생겨날 잠재적인 수많은 희생자가 모두 이날의 사건으로 생겨났다.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순간이라도 받아들였던 신군부의 쿠데타가 실은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이라는 점이 가장 많이 화가 난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분노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화가 나서 끝까지 지켜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이 영화를 열심히 봐야 한다. 더 따지고 파헤쳐서 숨은 진실들을 더 밝혀내야 한다. 비참했던 우리 곁에도 조국과 국민을 사랑하는 이태신과 같은 참다운 군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앞에서 정치를 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두 눈을 뜨고 세심하게 지켜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이런 비극이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서울의 봄’이 ‘서울의 겨울’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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