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글을 펼치고 쓰는 데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라고 여기지만,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특유의 반골 기질이 있다고 믿는다. 누구의 ‘명령이나 권위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 그 정신이야말로,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고고함을 굳건하게 세워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순수문학이 좋아서 국문학과에 진학했고, ‘돈을 못 버는 과’라는 주변인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4년을 버텼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직업을 가지기 위해 기웃거릴지언정 문학을 돈벌이로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당시 저렴하다 평가받았던 로맨스 판타지나 추리소설, 판타지를 남몰래 좋아해도 그런 흥미 위주의 창작류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남다른 개인 취향이야 어떻든 시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작가정신이 듬뿍 담긴 문학만은 누구보다도 고고해야 한다고 믿었다. 고귀한 문학의 세계를 돈벌이와 결부시키지는 않는 길만이 우리 문학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그런 마음만으로 우리 순수문학을 지키기는 어려운 걸까? 요즘은 등단하고 문학을 하는데도 돈이 필요한 시대이다.
얼마 전 한 문예지 공모전에 두 편의 글을 제출했다. 이곳은 상들에 따라 차별화된 상금이 걸린 동시에, 당선되기만 하면 바로 수필가, 시인, 동화 작가로 바로 등단할 수 있다는 화려한 문구가 적힌 공모전이었다. 그동안 써 왔던 작품들을 내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큰 상을 탈 만한 깜냥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작가 지망생들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간지 신춘문예 기간은 이미 지난 터라 연초에 뭐라도 도전해서 글 쓰는 동기를 바짝 세우고 싶었다. 그 공모전에 작품을 낸 이유는 그야말로 초라한 문학 운을 시험해 보자는 마음뿐이었다.
작품을 내고 며칠 뒤, 공모전 담당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내가 제출한 두 편의 글 중 한 편이 대학교수들이 포함된 심사위원들로부터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바로 문학계 등단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대외적으로 '수필가'로서 명칭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슬며시 돈 얘기를 꺼냈다. 내 이름이 들어간 책을 몇 부 인쇄하려면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단돈 50만 원이었다! 만일 시간 내에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당첨 사실과 등단 기록이 바로 취소된다는 경고를 하면서 말이다.
본인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간 책을 가지는 것은 모든 글쓴이의 꿈이다. 작가 지망생들이 아등바등 등단하려는 목적도 결국 못다 한 자기 이야기, 본인 책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이다. 매해 연말마다 실시되는 신춘문예와 메이저급의 공모전에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등단하고 싶은 수많은 작가 지망생 잠룡들이 넘쳐난다. 그 불쌍한 군상들이 가시밭길 같은 기다림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선택하는 또 다른 방법이 바로 자비출판 책이나 출판사 투고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동안 피땀 들여 써왔던 자기 글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제발 내 글 좀 읽어달라’고 애걸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방법에도 돈이 꽤 필요하다. 자비로 책을 출판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출판사 투고로 세상에 나온 책들도 작가는 '서평'. '홍보'라는 과정을 통해 일정한 분량을 팔아야 한다. 영화배우들이 영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 홍보에 힘쓰는 것처럼, 유명 작가들뿐만 아니라 무명작가들 역시 북토크와 같은 여러 행사에 끌려다니며 자기 책을 알리고 팔아야 한다. 그래야 치열한 출판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출판시장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7명의 문우와 함께 쓴 공저 책을 어떻게 출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올해 1월 중으로 ‘오신나 에세이 클럽’ 이름으로 책이 나올 예정이다. '오묘하고 신비한 나의 글쓰기'라는 뜻을 지닌 '오신나 에세이 클럽'은 8명의 문우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7명의 문우는 뜻을 모아 공저 책 한 권 출간했다. 이 책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각각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문우들이 자기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이 책을 출판사 투고로 할까, 부끄끄 pod로 출판할지 우리들끼리도 논란이 많았다. 각자의 경험에서 풀어낸 7색의 내용들은 꽤 재미있었고 크게 자랑할 만하다 여겼지만, 출판사 투고를 선택하지 못했다. 출판사 투고를 해서 출간이 되면 그 책 인쇄비를 감당할 정도의 분량을 팔아야 했고, 책 홍보에도 전력을 다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나를 비롯한 6명의 문우는 천상 글쟁이들이라 공짜로 준 연필 한 자루도 팔지 못할 만큼 소심했다. 게다가 각자 다른 일들로 바빠 책 홍보에 뛰어다닐 시간도 자신도 없었다. 결국 다른 출판사들의 화려한 홍보와 마케팅 전략 대신, 재고 없이 책 주문이 들어오는 만큼 제작해서 파는 부끄끄 pod 방식이 최선이었다.
이처럼 책을 출간할 때도 얼마간의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그저 책 읽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독서인으로 살 때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게다가 순수문학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는 몇몇 문예지에서 등단을 애타게 갈구하는 작가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등단 장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놀랍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 명칭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사람들이 시인이 되고 싶고, 소설가가 되고 싶은 이유는 그 명칭을 갖기까지 쏟았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글 쓰는 재능에 대한 권위 있는 사람들의 인정 때문이다. 문학계에서의 등단이라는 의미는 다른 직업에 비해 ‘돈 몇 푼 못 버는 분야’이지만, 열심히 잘 견디고 버텨온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단한 작가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수한 문학 시장에서 ‘등단 장사’라니, 너무 비통하고 서글플 따름이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문학 시장이라면, 더는 이쪽 세계에 발도 디디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내 펜을 과감히 꺾을 것이다.
결국 난 그 공모전에 50만 원을 입금하지 않았다. 그렇게 올해 '수필가'로서의 화려한 등장 역시 물 건너갔다. 누구에게나 내세우고 싶은 공적인 명칭을 갈망하지만, 아직은 돈을 주고서 살 만큼 비굴하지 않다. 이것은 그동안 책을 끼고 사는 열성독자이자 내 생각을 '쓰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돈이 아니라 내 능력을 인정하는 공모전과 신춘문예에 도전할 것이다. 그렇게 화려하게 비상하고 싶다.
만일, 그런 무모한 도전들이 모두 실패로 끝난다면….
그렇다면, 스스로 만족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글쓰기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글이란 것은 본래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으로 쓰는 창조물이다. 그렇기에 굳이 생판 모르는 남의 인정만이 내 글의 가치를 판가름할 기준이 된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쓰고 또 쓰다 보면 글쓰기를 하산하고 싶은 경지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는 동안 시중에 좋은 책들을 발굴하고 읽으며 느낌을 남기는 ‘쓰는 인간’으로 살 것이다. 돈으로 작가가 된 사람들의 엉터리 책들은 무시하고, 자본주의 힘의 논리 속에서 사장된 재능 있는 작가들의 ‘좋은 책’ 들을 찾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순수하게 문학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소명이자 나만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