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같이 일을 시작했던 동기 한 명이 조직에서 떠나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휴직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그야말로 ‘1년을 쉬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물론 현재 속해 있는 조직은 유연한 고용 구조라 개인적인 사유로 쉬는 것은 문제가 될 게 없다. 하지만 그 일이 지금까지 마음에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분이 그만두는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충격과는 별개로 현재까지 조직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너무도 잘 굴러가고 있다.
남편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조직에서 사람이 떠나고 다시 들어오는 일은 원래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그동안 정말 많은 사람과의 이별과 만남을 경험했다. 팀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정년을 넘겨 계약직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회사를 떠난 동료가 다시 관련 중소기업으로 취업하기도 했다. 조직사회에서 '성과’와 '돈‘ 그리고 ’목표‘에 따라 냉정하게 갈라질 수 있는 것이 바로 고용관계이자 인간관계였다.
사람과의 소소한 대화를 즐겼던 내가 어느 순간 효율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꽉 메우기 시기는 정신없이 바빠지면서부터였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수업 계획 프로젝트 회의들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의 ’근황 토크’로 회의 시간을 빼먹기 싫었다.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1분 1초라도 회의를 빨리 끝내고 쉬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회의 시작 때 ’안부‘라도 물으려는 분위기가 느껴지면 절로 한숨이 나오곤 했다. 마음이 너무 바빴다. 주어진 시간은 몹시 더운 날 겨우 챙겨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조각보다 더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시간의 효율성을 악착같이 생긴다 한들, 벌여놓은 일들이 특별히 더 잘되는 것도 아니었다. 참 이상하게도 말이다.
올해 조직을 그만둔 그분은 수업에 대한 열정도, 그리고 조직에 대한 불평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 선생님은 항상 각자 만든 ’수업 자료 공개’와 ’같이 짜는 협동’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애써 만든 개별 수업 아이템만은 공개하기를 꺼렸다. 그러다 보니 매번 수업 자료 공개를 주장하는 그분의 모습은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너무 튀어 보였다. 한 명의 독불장군처럼 말이다. 어쩌면 서로 수업에 대한 고민과 수업 아이템을 공개하지 않은 삭막한 조직 분위기가 그분이 떠나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애써 이런 조직 분위기에 대해 변명하자면, 개인 수업 자료들을 각자의 밥줄로 생각하는 탓이다.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 수업 교안이 생각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조금씩 떼어주는 한 조각의 수업 자료들, 아이디어들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할 때마다 부족함을 느끼고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다 보니 수업 자료를 쉽게 보여줄 수 없다. 몇 시간에 걸쳐 힘들게 만든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넘겨주기가 무척 아깝다. 열심히 짠 수업 PPT를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듣고 싶어도 항상 누군가 이 내용을 그대로 도용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성과주의의 바다에 푹 빠져있는 나 자신이 무척 안쓰럽다.
지금까지 경험한 대한민국은 누군가를 제치지 않으면 1등이 될 수 없는 사회였다. 열심히 노력하는 99%의 다수보다는 한 사람의 소수에게 더 큰 찬사를 보내는 곳이었다. 오직 1등 만을 기억하고 축복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99%의 평범한 인물들인데도 말이다. 소수를 위한 경쟁주의와 성취 주의는 우리 사회를 깊게 자리 잡은 망령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효율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모두를 위한 조직, 다 같이 행복한 사회는 역시 심리적 안전과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수업 자료를 공개해도 무작정 도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일 중심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함, 어떤 고민이 있으면 한 번쯤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는 여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신념이 없다면 조직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당장 먹기 좋은 떡처럼 보이는 성과주의, 효율주의는 결국 나중에는 쉬고 딱딱해질 과거의 유산이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묵묵히 바라보는 나머지 99명의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