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딩링 지음(2012, 창비)
'중국에는 아직도 이런 자유가 없다'
‘중국에는 아직도 이런 자유가 없다.’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딩링 지음 (2012, 창비)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와 권력의 부패를 날카롭게 풍자했던 작가이다. 히틀러가 등장하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상황에서 글을 썼던 그는 에세이 <나는 왜 쓰는 가?>에서 작가의 소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p.294)을 썼을지 모르지만, 본인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p.297)로 만들어야 했다고 말이다. 조지 오웰이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p.294)이다. 소설가의 그런 노력이 시대에 따라 권력 비판을 풍자한 글로 이어질지, 혹은 탄압으로 인한 선전도구로 활용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작품들을 읽고 난 후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독자들이 선택할 몫이다. 작가 딩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탄압을 받아 20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지식인이다. 그녀의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1937년에서 1978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로, 격변기의 중국 현대사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중단편 모음집이다.
딩링(본명 쟝웨이)은 ‘죽은 듯 고요한 문단을 공격한 폭탄’이라 불리며 중국 현대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다. 생전의 그녀는 청(靑) 왕조(1616~1912)의 몰락과 국공합작(1924~1927, 1937~1945), 중화인민공화국(1949~)을 거치는 중국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살았다. 1904년 후난 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학작품을 접했고, 5.4 신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열여덟 살 때 ‘딩링’으로 개명하며 작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딩링은 전통에 저항하고 혁명에 앞장서는 여성 지식인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특히 1927년 예민한 젊은 여성 지식인의 내면을 묘사한 <소피의 일기>는 문단과 젊은 독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작가의 작품세계는 중국이 안팎으로 큰 변화를 겪던 1930년대를 거치며 농민과 하층민의 고통을 다루는 현실 참여적인 경향으로 바뀌었다. 공산당 정권 수립 후 우파 지식인으로 비판받으며 약 이십 년간 작가로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녀는 척박한 변방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십 년이 넘게 글을 썼던 딩링은 격변했던 중국의 근현대사와 사람들의 삶을 작품 속에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집에는 네 편의 중단편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병원에서’,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 ‘두완샹’이 있다. 소설들은 모두 작가가 고향인 남방을 떠나 서부전선에서 농민과 홍 군 들과 생활하며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문화계 관료로 활동했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단편들에는 시기별로 달라지는 작가의 사고와 생각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표제작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1941)는 딩링이 옌안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를 마을 사람들의 의식과 시대상과 함께 비판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두 번째 소설 ‘병원에서’(1941)는 도시에서 온 여성 지식인 루핑의 눈으로 바라본 농촌사회와 변화를 꺼리는 간부들의 타성이 표현되었다. 세 번째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1937)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인에게 체포된 홍 군 소년의 에피소드가 담겼다. 마지막으로 ‘두완샹’(1978)은 가난한 농촌 출신의 완샹이 중국 공산당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노동자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흥미롭게 바라볼 부분은 시대별로 바뀌는 작품 성격이다. 작가는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에서 ‘위안부’였던 류전전의 일화를 소개한다. 딩링이 항일전쟁 시기에 중국 공산당이 일반 여성들을 동원하여 일본의 정보를 캐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공했던 성적인 활동은 보수적인 의식을 지닌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았다. 1년 만에 병을 얻어 귀향한 전전은 과거의 일에 대해 “내가 그곳에 대해 잘 아는 데다 중요한 일이라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도 없었다.”(p.26)며 당당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도덕한 여자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어야 해.”(p.18)라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과 “자신은 깨끗하고 강간 같은 것은 당한 적이 없다”고 뻐기는 주변 여자들을 보며 무너진다. 결국 전전은 본인의 병을 치료하겠다는 당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자의 앞날을 위해 분투”(p.40)하겠다고 다짐하며 마을을 떠난다. 그 당시 여성의 성을 이용해 ‘애국’을 한다는 공산당의 정책은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지 못했고 큰 반발을 샀다. 결국 중국 격변기의 희생자였던 전전은 가족과 연인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단편 ‘두완샹’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중국 공산당이 표방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왔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보잘것없었던 주인공 완샹이 시련을 통해 이상적인 노동자로 변화되는 과정을 영웅담처럼 그렸다. 여성 간부가 된 완샹은 사람들이 꽉 찬 강단에서 본인이 “궁벽하고 조그마한 산골에서 태어나 대대손손 고생스럽게 일하면서 온갖 착취와 압박”(p.143)을 겪었지만, 베이다황에서 늪과 황무지를 개간하고 조국을 위해 일하며 ‘새로운 노동자’로 태어났다고 강연한다. 그녀의 호소는 “오로지 당의 지도하에, (...) 당의 요구에 따라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죽는 날까지 분투”(p.145)하겠다는 외침으로 끝난다. ‘두완샹’은 1955년 우파 지식인으로 비판을 받아 20년 넘게 집필 활동을 못 했던 딩링이 197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이 중국 현대사를 지나온 여성들의 삶과 심리, 중국 사회에 향한 비판을 날카롭게 담았던 것과 비교하면 겉으로 읽히는 ‘두완샹’은 당을 위한 선전소설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의 이런 기조 변화가 단순히 작가의 권력에 대한 순응으로만 보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중국 근현대사를 묵묵히 견뎌온 딩링의 삶을 생각하면 ‘두왕샹’ 역시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중단편 모음집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중국 현대사를 살았던 여성들의 모습이 격변의 부침과 함께 잘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적인 가치가 크다. 작가 딩링 역시 근현대사와 문화 대혁명의 파란만장했던 파고를 그대로 겪으며 살았다. 1978년 문화 대혁명이 종식되었을 때 그녀는 일기에서 “글을 쓰려면 더욱 깊이, 더욱 생활화해서 써야 한다. (...) 중국에는 아직도 이런 자유가 없다.”(p.156)라고 ‘자기 검열’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음을 고백했다. 이 소설집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권할 만하다. 하지만 딩링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심리묘사가 담긴 작품을 읽고 싶은 독자들은 당의 탄압으로 인해 비판적인 관점이 점점 드러나지 않는 후반기 작품들이 아쉬울 수 있다. 그럼에도, 50년 동안 최선을 다해 집필한 중국 여성 작가의 저력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