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뭐야? 바로 사랑이야.’
<격정세계 激情世界> 찬쉐 지음 (2024, 은행나무)
‘문학이 뭐야? 바로 사랑이야.’
<격정세계 激情世界> 찬쉐 지음 (2024, 은행나무)
1953년생인 중국 소설가 찬쉐(残雪)는 문학 평단에서 ‘20세기 중엽 이래 가장 창조적인 중국 작가’이자 ‘선봉파 문학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미국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찬쉐를 가리켜 “중국에 노벨상 수상의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바로 찬쉐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중국의 전통 무속신앙과 단테, 보르헤스, 카프카 등 작품들의 영향을 받은 찬쉐는 동서양이 결합한 독특한 문학 세계를 지녔다. 그녀는 미국 최우수 번역 도서상, 말레이시아 플라워 트래비스 월드 중국 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매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찬쉐는 문화 대혁명으로 초등학교 교육만 받았지만, 문학과 철학을 독학하며 글쓰기를 시작한 인물이다.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격정세계 激情世界>(2024, 은행나무)에는 작가가 평생 고민하고 추구했던 문학에 관한 생각과 격정이 9명의 등장인물의 삶과 긴밀하게 엮이며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문학과 예술의 도시 ‘멍청(蒙城)’의 ‘비둘기 북클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문학을 사랑하는 연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상적인 문학인이라고 꼽히는 ‘이(儀) 아저씨’, 독자로서의 ‘샤오쌍((小桑)’과 ‘샤오마(小麻), 차오쯔(雀子)’, 소설가로서의 ‘한마(寒馬)’, 평론가로서의 ‘헤이스(黑石)와 페이((費), 리하이(李海)’, 서점인으로서의 ‘샤오웨(曉越)’. 9명의 등장인물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글쓰기와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사연으로 ‘비둘기 북클럽’과 인연을 맺고 본인만의 속도로 문학의 열정과 사랑에 흠뻑 빠진다. 그 속에서 9명 중 어떤 인물은 독자에서 작가로 변모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문학과 현실 속의 삶 속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혹은 남모를 연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소설은 1부 ‘샤오샹과 친구들, 부모’, ‘2부 한마와 페이, 이 아저씨와 샤오마, 한마와 샤오웨’, 3부 ‘헤이스와 차오쯔, 차오쯔와 리하이’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보면, ‘비둘기 북클럽’의 주요 남녀들이 그리는 연애소설처럼 읽힌다. 하지만 작가는 몇몇 특정 인물들의 연애담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들이 사랑하고 빠져있는 문학을 비중 있게 다루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9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한마’는 독자들의 해석에 따라 작가 찬쉐의 분신처럼 보일 수 있다. 그녀는 1장의 중심인물, ‘샤오샹’의 직장 동료이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저 독서 내공이 뛰어난 ‘샤오샹’의 주변 사람으로만 끝날 줄 알았던 ‘한마’가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비둘기 북클럽’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북클럽의 주요 인물인 ‘페이’와 사랑에 빠지고 글쓰기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낀다. 한마는 이미 ‘페이’ 곁에 전 연인인 ‘웨’의 존재가 있다는 걸 알지만, 모든 걸 감수하고 결혼을 감행한다. 오직 ‘페이’와 함께 있을 때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강하게 솟아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마’의 문학에 대한 애정은 ‘샤오샹’의 대화 속에 잘 표현된다.
“페이는 꿈의 실현을 도울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고요.” (p.129)
“소설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이상하죠? 난 먼저 문학과 사랑에 빠졌고 그다음에 페이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둘이 마치 하나인 것 같아요.”
“이상할 것 하나 없어, 한마. 문학이 뭐야? 바로 사랑이야. 그래서 네가 사랑에 빠진 거라고.” (p.130)
하지만 서로 출발점이 달랐던 ‘한마’와 ‘페이’의 사랑은 현실 속에서 행복한 끝맺음이 되지 못한다. 결국 ‘페이’는 옛 연인 ‘웨’의 곁으로 떠났고, ‘한마’는 ‘페이’와의 아픈 이별을 소설 쓰기로 승화시킨다. “이에 한 문장을 썼다. 바짝 뒤쫓아 또 다른 문장이 펜 끝으로 찾아왔고, 그 뒤고 세 번째도 네 번째로 줄줄이 이어졌다. (p.351) ‘한마’는 이별 후 생겨난 글쓰기 열정을 ‘페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연인’라고 칭한다. 작품은 ‘한마’를 문학이 있기에 현실 속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고 ‘페이’를 마음 편하게 보내는 인물로 그려낸다.
반면, 3장의 주요 인물인 ‘차오쯔’는 문학에 관심 없는 현실 속 일반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문학인이었던 ‘헤이스’의 외면을 받은 여인이기도 하다. 이 장은 ‘헤이스’와 10살 어린 ‘차오쯔’의 과거 연애담과 이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둘은 한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지만, 서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달라 매번 갈등에 휩싸였다. 특히 ‘차오쯔’은 현실의 중요한 순간마다 ‘비둘기 북클럽’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헤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헤이스’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차오쯔’는 “평범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게 두 사람이 어긋나는 지점이었다.” (p.575) 결국 두 연인은 ‘물질적 성숙’과 ‘정신적 성숙’ 차이에서 큰 갈등을 빚고 헤어진다.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한 ‘차오쯔’는 결국 이혼하고 ‘비둘기 북클럽’의 회원으로 가입한다. ‘차오쯔’의 일화만 살펴보면, 작가는 ‘물질적 성숙’보다는 문학만을 위한 ‘정식적 성숙’에 더 무게를 둔 인간군상을 그린다.
<격정세계>는 문학을 사랑하는 연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일곱 쌍의 남녀들이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깊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들은 흥미진진하다. 흔한 통속소설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바로 이들이 사랑하는 ‘문학’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리는 맹목적인 문학 열정은 소설에 관심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책은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감정이입을 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문학이 어디까지 구원하며 우리의 삶에 다시 ‘격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궁금한 이들에게 <격정세계>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