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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Dec 13. 2021

엄마의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급 연기

내 안의 모든 인내심과 연기력 끄집어내기

 배고픈 곰이 꿀을 끌어모으듯, 몇 주 전부터 세상의 달콤한 것들은 다 골라 담아 구매하고 있다. 한 개씩 톡톡 따 먹는 재미가 있는 유산균 짜x짜x, 보기만 해도 행복해 보이는 노란 바나나 우유, 크림이 듬뿍 들어간 기다란 크림빵 샌드 등 지금껏 사다 놓은 다디단 것들로 지금 냉장고는 터질 듯하다. 모든 것들이 다 아이들의 시험 기간 전투 간식들이다. 조금이나마 스트레스를 멀리 떨쳐버리길 바라며 냉장고 구석구석을 간식들로 채워 넣는다.

 

 바야흐로 아이들의 시험 기간이다. 가장 어렵고 중요한 선배들의 수능은 끝났지만, 앞으로 치를 미래의 시험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후배들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다 보니 12월은 한 달 내내 시험모드다. 다행히 고등학생인 큰 녀석의 시험은 지난주에 끝났지만, 중학생인 둘째의 시험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솔직히 입시가 코 앞인 큰 애에 비해 중학생인 둘째가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도 부끄럽지만 둘째가 수행평가를 언제 했는지, 기말시험 범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 녀석 역시 엄마에게 주절대며 말하는 성격도 아니고 나 역시도 꼼꼼하게 챙기지도 못하다 보니 매번 그러려니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무심한 나도 유일하게 둘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시간이 있는데 바로 이 시험 기간이다.


 아이들의 시험은 참 신기하다. 분명 평소에는 ‘너는 너, 나는 나’, 엄마와 아이들 모두, 서로가 독립된 개체임을 인정하고 서로의 구역을 잘 침범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시험 때만은 그 ‘불가침 조약’ 유지가 어렵다. 시험 기간 내내 엄마의 모든 레이더는 시험을 앞둔 아이들을 향해 있다. 괜스레 아이들의 시험 준비상태나 시험 앞둔 기분이 평소보다 두 배나 더 궁금하고 시험을 끝내고 나면 자신만의 전쟁을 끝낸 아이들을 붙들고 심문하고 싶다. 시험은 어땠는지,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은지, 다른 친구들은 시험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등, 온갖 아이들의 사소한 말과 표정에서 앞으로 아이들이 받아올 시험 성적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다.


 평소 아이들이 시험을 치는 경향을 봤을 때 큰 애는 적당히 공부 욕심도 많고 꼼꼼한 탓인지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둘째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공부를 하는 편이라 A 과목은 엄청나게 잘하고 B 과목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성적을 받아오곤 한다.

 사실 둘째가 치른 첫 중학교 시험 결과를 봤을 때 온갖 복잡한 감정으로 사흘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받아올 수 있냐’는 실망감, ‘그래, 그동안 신경을 안 썼으니 그럴 수 있지’라는 자포자기, ‘그래도 그렇지, 그 녀석은 공부도 안 했나?’ 싶은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들끓어 정말 많이 힘들었다. 그때 우리 식구들 모두, 갑자기 입을 꾹 다문 엄마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아들의 시험 성적이 엄마의 성적은 아니다.’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잘 알고 이해하지만, 막상 숫자로 된 성적표를 받아보면 마냥 나 몰라라 외면하기는 너무 어렵다. 엄마로서 책임을 못 했다는 자괴감부터 아들에 대한 실망감까지 온갖 감정들이 솟구쳐 오른다. 시험을 치르고 난 아이들의 노력을 먼저 알아주고 다독거리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막상 결과를 보고 나며 ‘자애롭고 훌륭한 엄마’의 연기가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최고의 엄마 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험 성적에는 연연하지 않고 그동안 고생했을 아들의 노고를 축하하며 태연할 수 있는 엄마의 평정심, 아들이 시험을 못 치면 아들의 성적을 궁금해하지 않을 용기, 아들이 시험을 잘 보면 다른 친구들의 점수를 묻지 않을 인내심, 시험이 끝난 후 아들의 꼴사나운 행동을 보고도 너그럽게 넘길 수 있는 여유. 그런 연기력을 갖추어야 할 때다. 이런 시험 기간이야말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버금가는 엄마의 활약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오늘부터 사흘, 수요일까지 난 최고의 엄마 연기를 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오늘 첫 시험을 치를 둘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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